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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后 박경무, 넘치는 열정으로 전통무용의 맥 이어가련다

길림신문 朝闻今日 2020-09-09

백성이야기


깊이가 묻어나는 무용수가 되는 것이 젊은 박경무의 꿈



‘열정부자’. 열정을 돈으로 치자면 부자만큼이나 차넘치는 경우를 비겨 이르는 말로 요즘 류행하는 신조어다. 얼마전 춤에 대해 누구보다 열정부자인 한 젊은이를 만났다. 젊은이가 추는 춤이라 하면 흔히 파워 넘치는 현대무를 떠올리기 쉽지만 그가 들려주는 춤이야기는 좀 다르다. 차츰 외면받는 우리의 조선민족무용, 그 불씨를 살려가는 그의 이야기는 그래서 더 특별했다.


‘하루라도 춤을 추지 않으면 몸에 가시가 돋힌다’는 박경무씨(24살), 2018연변TV음력설야회의 촬영에 응하기 위해 고향무대를 찾은 그는 한눈에 봐도 남자무용수의 넉넉한 스타일이 안겨왔다.


“‘요즘 세월에 남자가 전통무용을?’ 저를 처음 보는 사람들의 첫 반응입니다.”


우리의 전통무용이 외면받고 있는것도 사실이다. 그만큼 남자무용수도 흔하지 않다. 그와중에 전통무용 특성상 녀자무용수보다 남자무용수들이 눈에 띄게 적어 주변사람들의 관심은 더 집중될수 밖에 없다. 그런 관심을 한몸에 받기까지 그가 무용을 향해 달려온 집념을 허심탄회하게 들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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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 모두가 NO, 나만 YES!


TV에서 춤추는 장면이 나오기만 하면 무작정 텔레비죤앞으로 달려가 함께 따라추던 그의 어린 시절, 흥이 많아 그런줄로만 여겼던 그가 어느 순간부터 TV속에 나오는 춤들을 유심히 살피고 따라하기를 반복하며 남다른 집착을 보여왔다. 하여 소학교때 그는 남학생임에도 불구하고 과감히 중창대와 무용대에도 자진하여 가입했다. 녀학생들속에 둘러쌓여 무대에 올랐던 적도 많았다. ‘청일점’이였지만 의기소침하지도 않았다.


“무용수들의 화려한 의상도, 유유히 움직이는 멋도, 세상의 중심에 선듯 돌아치는 춤사위도 그냥 다 좋았습니다. 나중에 커서 꼭 무대에 저런 멋있는 춤을 추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남달리 무용을 좋아했던만큼 큰 키로 신체조건도 우월했지만 주변의 만류는 심했다. 더군다나 연변오동팀 축구선수 출신이였던 박문호씨의 아들인 그가 아빠의 뒤를 잇는 축구가 아닌 뜬금없이 무용을 택해서 주변반응은 더 이외였다. 무용을 처음 시작한다고 했을 때 가장 많이 반대했던 사람도 바로 그의 아버지였다.


“사내가 운동도 아닌 무용이라니, 그건 절대 용납못할 일”이라며 시작도 떼기전에 반대표를 내 든 아버지의 마음을 돌리게 된것은, 생각지도 못했던 생일잔치집에서였다.


작은 할아버지 생일잔치에 친척들이 모이게 된 그날, 연변예술학교 무용교수로 있던 그의 고모 박설화씨의 옷자락에 매달려 어린 박경무는 무용을 꼭 배워보고 싶은데 부모님의 반대가 극심하니 설득할수 있는 방법을 좀 알려 달라고 졸라댔다.


11살짜리 남자조카애가 무용을 배워보겠다고 진지하게 달려드는데 차마 단칼에 거절할수 없었던 고모 박설화씨는 그럼 이 자리에서 우리가 무반주로 노래를 부를테니 용기 있으면 한번 춤을 춰보라고 했다. 말이 그렇지 어린 경무가 선뜻 나서지 못할거라고 생각해 롱담 삼아 건넨 한마디였다. 하지만 그는 무반주 도라지 노래에 맞춰 2절까지 완곡을 멈추지 않고 춤을 췄다. 쑥스러움 하나 없이 끝까지 두팔을 휘젓으며 박수를 유도하는 어린 박경무의 춤사위에 친척들은 기특해하며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


의외로 용기있는 모습을 보여 고모의 “즉석면접”도 가볍게 통과한 그는 고모가 도와주겠으니 나중에 제대로 한번 배워보자는 승낙을 받아냈다. 예술학교에 들어가려면 3년을 기다려야 했다. 그동안 꿈이 열두번도 더 바뀌울만한 사춘기 시절이였지만 그는 오로지 무용수가 되리라는 꿈을 한시도 저버리지 않았다.


박경무씨 가족사진


무용인생의 시작, 불타는 구지욕


2009년 그는 오매불망 기다리던 연변예술학교에 들어가게 되였고 정식으로 무용을 배우기 시작했다.


흥이 많고 들썩거리기를 좋아해서 무작정 선택한 길이였지만 정작 전업적으로 배워보려고 하니 헤쳐나갈 숙제가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매끄러운 호흡이며 뻣뻣했던 상신으로 고운 선을 그려내야 하는 일도, 방향을 잘 잡아내야 하는 발디딤새도 억망이였다.


하지만 그는 스트레칭부터 꼼꼼히 다져갔다. 그러다보니 사흘이 멀다하게 발에 물집이 생기고 사지가 물러나듯이 아파났지만 그의 구지욕은 점점 불타올랐다. 굳어있는 몸을 풀어주고 유연성을 키우는데만 적어도 2년이 걸린다는데 무용학과 남학생들은 결국 그것에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는것이 대부분이라고 했다. 하여 같은 학급 7명 남학생들중 끝까지 견지하여 졸업장을 받아안은 남학생은 박경무가 유일했다. 그의 춤사위는 4년의 전업적인 체계를 거쳐 나름대로의 신념이 생겨났고 제법 무용수다운 자태를 뽐냈다.



연변예술학교에서의 4년으로 그의 구지욕을 꺾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배움에 목말라 있던 그는 2013년 중앙민족대학 무용학과를 또 다시 지원했고 전국 500명 경쟁자들 중 18명 명액안에 들어 더 깊이 배울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정식 대학생활을 시작하게 된 박경무씨에게 중앙민족대학에서의 4년은 그를 무용수로 이끌어 주는데 크나 큰 도움이 되였다. 보다 폭넓은 여러 민족무용을 접할수 있었고 더 깊은 리론과 실기수업을 받을수 있었다. 재학중 전교 두명한테만 주어지는 한국교환생 명액도 쟁취하여 한국 중앙대학교에서 1년 연수의 기회도 얻었다.


대학생활동안 그는 중앙민족대학을 대표하여 해내외 무대를 섭렵했다. 제1회 중국조선족무용대회에서 전업조 대상을 비롯해 2015년 “련꽃컵”민족민간무용시합에서 10대 우수작품상, 제3회 ”진달래”컵 중국조선족음악무용시합에서 금상 등 허다한 영예들을 안아왔다.


여러민족 무용수들과 함께 무대에 오른 박경무씨(뒤줄 왼쪽 네번째)


무대위에서 더 가빠지는 심장소리


“2009년 서울국제무용콩클 결승전이였어요. 서울국립극장에서 열렸는데 대구에서 오래동안 일하시던 어머니가 직접 와서 관람하던 그 무대가 가장 인상 남아요. 처음으로 어머니앞에서 무대에 올랐거든요.”


준결승에서 탈락되면 더는 자신의 무대를 보여드릴수 없을가봐 미리 준결승에 오시라고 했지만 평소 늘 엄격한 성격인 어머니는 기어코 결승무대에 가겠다고 여전히 아들에 대한 요구를 높였다. 그간 자신의 피타는 노력을 어머니께만큼은 꼭 무대를 통해 보여드리고 싶었던 박경무씨는 혼신을 다해 준결승을 마치고 결승 진출권을 따냈다. 누구보다 자랑스러웠던 아들의 무대를 현장에서 처음 보게 된 그의 어머니는 드디여 11살적 철없이 달려들었던 어린 아들의 꿈이 결코 틀리지 않았었다는걸 느끼게 되였단다.


춤을 추는 매순간이 즐겁지만 박경무씨는 유난히 벅차 오르는 무대가 있다고 했다. 습근평 주석도 관중석에서 지켜보았던 2016년 8월에 북경에서 열렸던 전국소수민족 전시공연 개막식이 그랬다. 조선족을 대표해 장고춤을 선보인 박경무씨는 그간의 땀방울이 무색하지 않게 정채로운 공연을 펼쳐 관객의 박수를 뽑아냈다.



“습근평 주석앞에서 공연을 선보인 것도 저로서는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지만 큰 무대에서 조선족장고춤을 춘다는게 너무나 뿌듯하고 가슴 떨렸어요.”


50일이 넘는 동안 이른 아침에 시작하여 자정을 넘겨 안무련습하던 그는 찢어지는듯한 온몸의 아픔을 참고 군무에 합류해야 했지만 마음 한구석은 더없는 긍지감으로 차넘쳤다.


현재 북경의 한 학원에서 무용을 가르치고 있는 박경무씨, 그에게는 특별한 학생들이 있다. 바로 북경에 살고 있는 한족들이 우리의 전통무용을 배워가고 있는것.


“조선족도 아닌 다른 민족들도 우리의 춤을 배우려 하는데 조선족인 우리가 전통을 잊어서는 안되지요.”


화려한 조명이 내리드리운 무대뿐이 아니라 작은 련습공간이지만 타민족들에게 아름다운 우리의 전통무용을 가르칠 때면 그 기쁜 마음을 감출수 없다는 박경무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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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인생의 멘토와 함께 서는 무대가 꿈


“생일잔치집 즉석에서 저의 꿈을 키워보자던 고모가 가장 고마운 사람”이라며 그는 고모를 자신의 무용인생의 멘토이자 롤모델로 꼽았다. 우리 조선민족무용을 가장 처음 접하게 된 것도 고모의 영향이 컸고 무용수가 되려는 꿈을 키워가는데 도움을 가장 많이 준 사람도 그의 고모였다. 기회가 온다면 멘토인 고모와 단둘만의 무대도 갖고 싶다는 소망도 내비쳤다.


“떡잎부터가 남달랐어요. 춤재주를 타고 났다는게 아니라 어린 나이에 그런 끈질긴 용기와 열정을 가진 아이들이 흔치 않아요. 그런 제자라면 스승으로서 마다할 리유가 없죠. 누가 봐도 욕심이 날만했으니까요.” 고모이자 스승인 박설화씨가 지켜본 조카제자 박경무씨에 대한 평가이다.


공연이 끝난 뒤 멘토인 아버지(왼쪽 첫번째), 고모(오른쪽 두번째)와 함께


예전에는 가르침을 받기만 하던데로부터 지금은 고모와의 소통도 곧잘 되고 있다는 박경무씨, 무용관련 질문만 받으면 망설이지 않고 즉각적으로 자신있게 자신의 생각을 답하는 그는 황홀한 무용세계에 빠져있었다.


“무용은 경험과 년륜이 쌓이면 쌓일수록 깊은 여운을 남긴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보다 기량을 더 갈고 닦아 깊이가 묻어나는 무용수가 되는 것이 꿈이기도 해요. 초심을 잊지 않고 제가 선택한 이 길을 끝까지 한번 밀고 가보려구요.”



24살 꽃청춘 박경무씨, 무대에서 한창 보여줄 것도 많은 나이지만 아직 배우고 싶은게 훨씬 더 많다는 그는 올 봄 다시 외국류학의 길에 오른다. 전통무용의 맥을 이어가려는 이 시대의 진정한 춤군, 희망과 열정이 샘솟는 그의 당찬 꿈이 하루 빨리 실현되길 기대해본다.


길림신문 김영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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