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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조선족] 3.내 청춘은 저멀리 광평농장에1(리광인)

조글로 zoglo.net 潮歌网 2020-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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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기억 

사진 클로즈업 70년대 사람들

- 광인이와 그의 친구들의 이야기


리광인


3.내 청춘은 저멀리 광평농장에 (1)



청춘, 청춘은 젊음이 싱싱 피어나던 시절, 내 청춘은 머얼리 70년대에 머물렀으니 벌써 47년 전의 일이지. 47년 전이라 하면 1973년을 가리키니 1973년이 들어서는 그 시대  70년대는 내 인생의 10대 후반으로부터 20대 초반과 중반을 기록하는, 젊음과 희망과 패기로 넘치어 나는, 내 인생의 청춘을 빛내이는 희망의 호시절이였다. 


1973년 2월 고중 화룡2중을 졸업하고 광평농장으로 귀향하면서 사진기의 필요성을 깊이깊이 느끼었다. 앞을 내다보고 큰 결단을 내리고 갈매기표 사진기 하나를 마련하였다. 형제남매들의 도움이였다. 그때 그 시절 그 사진기는 내 청춘이 머문 광평농장의 진실한 순간순간을 기록하였으니, 아래 집체사진 4장을 제외한 50여장 전부가 지난세기 70년대 귀중한 력사사진으로 여러 분들 앞에 펼쳐진다. 


70년대 광평농장 시절 현지사진들은 세번에 나누어 보여 드린다. 대부분 처음 알려지는 사진들로서 저작권을 가지며 저자의 동의없이는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한다. 사진들은 비록 장백산 아래 광평농장의 현지 기록사진들이나 그 시절 우리 조선족생활의 축도로서 우리를 40여년 전 그 시절로 이끌어간다...


그 시절 많은 옛사진을 생생한 사진으로 복원하여 주신 리광평 촬영가님께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



【인생소감】



내 청춘은 저멀리 광평농장에


 

청춘,청춘은 얼마나 싱싱 피어나던 시절이던가, 내 청춘은 저멀리 70년대에 머물렀으니 벌써 47년 전의 일이지. 47년 전이라 하면 1973년을 가리키니 1973년이 들어서는 그 시대 70년대는 내 인생의 10대 후반으로부터 20대 초반과 중반을 기록하는, 젊음과 희망과 패기로 넘치여나는, 내 인생의 청춘을 빛내이는 희망의 호시절이였다.



그해 1973년 1월 화룡현성의 화룡2중(고중)을 졸업하고 이달 27일에 장백산아래 백두고원ㅡ광평농장(广坪农场)으로 달려갔다. 화룡 시가지를 벗어난 려객버스는 남으로 소곡령을 넘어선후 로과로부턴 숭선까지 두만강을 따라 달린다.흥분과 설레임으로 벅찬 그때 그 시각의 귀향길 마음을 달리는 버스에서 한수의 즉흥시에 담아 보았다.


70년대 광평농장의 일각. 백두고원의 조선측 5호농장에서는 저렇게 비행기로 농약을 친다

 

달리는 버스에서

 

1973.1.27

 

불타는 석양 서켠하늘에 붉게 어리고

땅거미 온 누리를 장식하는 이 시각

질주하는 버스에 이 몸을 맡겨

내 올랐노라 기쁨의 벅찬 길에

 

억제할수 없는 이 내 심정 버스앞서 달리거니

무연한 광평벌 눈앞에 그려지고

앞으로 앞으로 달리는 버스도

너무나 너무나 굼뜨게만 움직이누나

 

어서 어서 달려다오 질주하는 버스야

너는 언제야 원정임무 완성하려느냐

너 어찌하여 나래돋혀 날지 못하느냐

대해마냥 설레는 마음 언제야 진정시키려나...


장백산 아래 백두고원에 자리한 광평농장의 대면적 밀밭 전부가 기계화작업. 농장의 련합수확기가 밀가을하는 장면

 

화룡에서 버스를 타고 고성리라 불리우는 두만강반의 숭선으로 달릴 때의 즉흥시다. 숭선에서 다시 서남쪽 산길을 따라 40여리를 조이니 동경벌이고 광평령이다.광평령에 오르니 장백산 아래 백두고원에 자리한 광평농장의 일목일초가 환히 펼쳐진다. 그야말로 온 농장이 두팔 벌려 나를 반가이 맞아주는듯한 들뜨는 기분.

나는 우뚝 솟은 백두산이 한눈에 보이는 광평령에서 소리소리 질렀다. 광평아, 내가 왔다. 너를 찾아 내가 왔다! 그러는 나는 이윽토록 광평령을 내리지 못하였다. 백두고원의 광평벌이며, 그 변두리를 흘러내리는 두만강물이며, 오붓한 농장의 문화주택들이 그토록 정다이 안겨진다. 그 모습모습을 한폭의 진실한 풍경화로 그려내지 못함이 한스러울 뿐이다.



광평농장에서의 새 생활은 그렇게 첫 페지를 펼치였다. 고중을 졸업하고 농장으로 귀향하였다고 농장지도부에서는 나에게 다른 일이 아닌 양몰이란 간거한 과업을 맡기였다. 한 청년을 단련하고 고험하자면 양몰이부터 해보아야 한다나, 그렇게 고중졸업후 첫걸음은 양몰이로부터 시작되였으니 그때 심경이 고스란히 나의 일기에 적히였다.

 

오늘 지도부에서는 나더러 양을 방목하라고 하였다. 나는 기꺼이 대답하고 양몰이에 나섰다. 이것은 농장지도부와 직공들이 나에 대한 최대의 관심과 지지이며 배려이다. 나는 영광스러운 양몰이에 나선것으로 하여 더없는 기쁨과 긍지감을 느낀다.

 

                                                     ㅡ1973년 1월 29일



그 시절 1973년 일기책에 적은 한단락의 일기다. 지금보면 우스운 일이지만 그때 그 시절은 정말이지 농장지도부에서 나에 대한 조금도 가식이 없는최대의 관심과 지지, 배려요, 더없는 기쁨과 긍지감으로 생각하였다. 양몰이도 영광스럽다는 흘러간 시절이였다. 그러면서 진짜 농장 당조직의 사랑과 배려로 농장 공청단총지위원회 부서기를 맡아나섰다. 서기는 공산당원인 한족친구 림금생(林金生)이 맡아 보았지만 나는  공청단사업의 일상을 책임지고 나가는 주관서기였다.



농장당조직에서 나를 믿어주며 받들어주는것은 당조직으로서의 일리도 없지 않았다.화룡2중 시절 수필에서 스친 바이지만, 1973년 1월 그전까지만도 나는 고중인 현성의 화룡2중에서 학교 공청단총지위원회 선전위원과 학급 단지부서기를 하면서 당중점적극분자로 활동하고있었다.학교 당총지 서기 박경선선생님은 우리가 졸업하기전에 나를 입당시킨다고 직접 말해 주었었다.이는 고립적인 일이 아니여서 그때의 도문철로중학교와 남평중학교 등 학교들에서 학생당원이 실제로 출현한 정황이였다.



그런데 졸업을 앞두고 관련 당의 지식분자정책이 하달되면서 문화대혁명가운데서 밀리였던 고린내 나는 아홉째(臭老九)가운데의 적극분자를 입당시키면서 학생가운데서의입당은 자연히 밀리게 되였다.당시 학생간부인 나는 이런 상황을 알수가 없었는데 1972년 말의 어느날 학교 당총지 박서기가 나를 찾아 주었다.

광인동무, 미안하오. 학교 당조직에서는 동무를 첫패의 학생당원으로 발전시키려 했는데 교원내 지식분자 정책시달로 밀리게 되였소.



그 말씀을 들으며 나의 얼굴은 몹시 상기되였다. 고중졸업전에 꼭 입당하리라고 믿어마지 않았는데 물거품으로 되고있었다. 그래서 주밋거리며 인차 대답을 못하니 박서기는 자료한부를 나에게 건네였다. 광평농장 당조직에 넘기는 당 중점발전대상 소개서였다.소개서에는 학생당원 발전사업이 밀린 상황을 밝히면서 광평농장 당조직에서 한동안의 고험을 거쳐 당원으로 발전시켰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첨부되여 있었다.

보았지. 원래는 이런 소개서를 본인에게 보이지 않는다오.그렇지만 광인동무가 너무 실망할가봐 보여주는거요.광평농장에 가서 잘해보오.화룡2중 졸업생가운데서는 첫패의 입당이 될것 같소. 

그제야 나는 화기가 돌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를 련발하게 되였다. 그때의 꾸밈 없는 회상이다.


농장의 녀 하향지식청년들


광평농장 당조직은 화룡2중 당총지의 소개서에 깊은 중시를 돌리였다. 화룡2중 다니기전 1971년 초이후 한때 농장에서 그 시절 첫 공청단지부 주요책임자로 활동한적 있은데서 더구나 그러하였다. 농장 당조직에서는 공청단총지 서기는 당원이 맡는다면서 나를 100여명 청년들의 공청단사업을 책임지는 주관부서기로 임명하고 받들어주었다.날마다 힘이 부쩍부쩍 났다.날마다 휘휘 휘파람을 불며 퐁퐁 뛰여다녀도 힘드는줄 몰랐다.



1973년 그해 내 나이 갓 20살, 말그대로 지난세기 70년대 초반을 이루는 그 시절은  젊음과 희망이 싱싱 피여나고 앙가슴에 더운피 끓어번지던 한창 나이였다. “사회주의 새농장을 건설하려는” “장한  품고 장백산아래 백두고원의 광평벌로 돌아간  내 첫 작업이 내몽골 대초원의 양떼 흐름을 방불케 하는 양방목이란 이 직업.

혹자는 연변이란 이땅에서 양몰이로 어떻게 청춘을 빛내이냐고 물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면 나는 청춘은 사회주의 건설의 모든 일터에서 빛날수 있다고 대답할것이다. 당년 이 나라 내몽골 대초원에서 수천수만에 달하는 지식청년들이 양몰이, 말몰이 등 방목전선에 나선 것처럼 우리 광평농장의 참이름은 수천마리의 양떼 유유히 흐르는 화룡현 광평목축장(畜牧场)이고, 연변의 반세모양(半细毛羊) 생산기지로서 양몰이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였다.



고중졸업후 내 청춘은 이같이 광평농장에서의 양몰이로부터 시작되였다. 양몰이로 이태 남짓히 흐르다가 나는 농장지도부의 파견으로 농장 지식청년들이 가장 많은 인삼대에 배치되고, 다시 농업대 정치대장으로, 농장자제학교 교원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그 나날은 내 청춘이 머무른 백두고원 광평농장에서의 짧지만은 않은 6년 세월.

이 6년 세월속에서 불운하게도 두번이나 억울한 사건에 휘몰리며 농장 공청단총지부서기에서 떨어 지기도 하고, 한시기 비판과 투쟁을 받다가 현공안국 수용소에 석달 갇히기도 하였다. 대학입시제도가 회복된후 첫해 대학입시에 합격되였지만 77년급 입학에서 정치심사관을 넘기지 못하여 77년급 첫 대학생으로 되지도 못하구.



그러나 두번으로 이어진 광평농장에서의 억울한 사건도, 대학 77년급 락선도 나를 거꾸러들이진 못하였다. 광평농장에 새로 온 정공간사 김병칠씨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서면서 정치심사관을 넘어서며 종내는 연변대학 조문학부 78년급 대학생으로의 꿈을 이루어냈다. 조선족력사학자로의 외진 인생려정을 꾸준히 걸어왔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나는 화룡2중을 졸업한후의 나 인생의, 나 청춘의첫 걸음을 내내 잊지 못한다. 고중을 졸업하고 사회로 진출한후의 첫 걸음은 화룡현 광평농장에서의 양몰이로부터 시작되고, 내 청춘은 머얼리 장백산 아래 두만강 최상류 광평농장에 머물고...

 

2020년 3월 31일 재정리


한때는 농장 농업대 정치대장으로 뛰면서 농기수로도 활약하고...


한때는 농장 인삼대 청년들과 뒹굴기도 하고...


한때는, 농장자제학교의 교원사업에도 충실하고. 내가 담임교원으로 나선  4학년의 여덟 붉은 넥타이들...


내가 가르치는 반 애들과 농장의 감자캐기 로동체험도 해보고


농장자제학교 학생들 속에서


농장 운동회 이모저모 현지기록


농장의 야외 들놀이 성수나오


흥나는 농장의 문화생활 일각들. 나는 농장 모택동사상선전대 책임이기도..







장백산 아래 두만강 최상류에 청춘들이 꽃핀다오



농장력사, 70년대 력사의 한 기록자로 된 재미



백두고원의 광평농장은 조선의 5호농장과 두만강을 사이두고 이어져



내 청춘은 저멀리 광평농장에 

2020년 4월 7일


精选留言

  •  1

    刘英子(朋友)


    소중한 사진 뜻깊은 회억들 풍부합니다. 글도 세련되고

  •  1

    李光仁(朋友)


    박관일ㅡ 력사학자의 발자취를 잘 감상했습니다. 디지털시대에 아날로그 채플린이 그리운 요즘입니다. 대홍단은 감자가 유명했고 예술영화(열네번째 겨울)의 활무대였다고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020.4.7

  •  1

    李光仁(朋友)


    주청룡ㅡ 영광스러운 양몰이군으로부터 어였한 대학생,  교수,  력사학자 참 빛나는 일생입니다 2020.4.7

  •  

    尚功


    了不起!看骑马的照片,第一个浮现的感想是了不起!!!应该是上世纪七十年代的照片吧?每一幅都很珍贵照片!

  •  

    李光仁(朋友)


    최진옥ㅡ 70년대에 사진기를 마련했다는것은 앞날을 내다본 안목이 있다는 표징입니다. 사진기가 있었기때문에 살아온 순간들을 기록할수 있었고 또 교수님의 자상한 성격으로 하나하나 보관을 잘 했기에 우리 후배들도 그때그시절을  생동하게 알아볼수있는 기회가 있어 고맙습니다. 광평농장에는 농장 흔적이 남아있는 가운데 수림이 꽉 박아들어서고 화룡림업국광평림장이 있습니다 20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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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光仁(朋友)


    태경준ㅡ 형님, 총지니고 말을 탄 모습 참 멋지십니다 ! 20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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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光仁(朋友)


    안여사ㅡ 멋진 선배 자랑스럽습니다 20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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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光仁(朋友)


    리민덕ㅡ ㅎㅎ, 사진 많이도 남겼네 20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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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光仁(朋友)


    真玉ㅡ 좀 늦었습니다. 소중한 사진과 추억에 담긴 청춘이 피여나던 시절을 잘 감상 하였습니다 2020.4.7

  •  

    李光仁(朋友)


    jin sheng yu '벅찬 나날' 사진들 잘 보앗슴다. 만반감회! 20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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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光仁(朋友)


    신옥ㅡ 다시한번 광평농장의 옛 추억이 떠오르네요 20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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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光仁(朋友)


    英智ㅡ 지나간 발자취마다에 남겨놓은 좋은 사진들과 그 시절의 열정 의력 탄복입니다 ! 20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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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光仁(朋友)


    리성남ㅡ 马到成功 20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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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光仁(朋友)


    리룡해ㅡ 참 재밋게 봅니다 20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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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光仁(朋友)


    원희복ㅡ 중국은 코로나19가 잦아드는 분위기군요. 다행입니다 20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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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光仁(朋友)


    한일성ㅡ 실로 역사의 발자취를 생생하게 기록한 보람이 있군요. 감동받았습니다 20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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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光仁(朋友)


    云帆 박삿갓ㅡ 紧握钢枪,骏马奔驰保边疆,威武!20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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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光仁(朋友)


    권정옥ㅡ 희망과 정열, 패기로 넘치던 열혈 청춘시절의 선생님 모습이 눈앞에 선히 떠오릅니다 20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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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似水人生


    잘 감상했어요 , 정말 탄복해요, 그렇게 오래된 이야기와 사진들 어쩜 그렇게 잘 정리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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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全正革


    照片是记录历史记忆的真实物证。照相机记录时代瞬间的精彩和历史发展历程的情感。谢谢您的宝贵资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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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云帆박삿갓


    격정세월,혁명에로,충정으로 피끓는 청춘,돌격총을 메고 준마 타고 변강 산천을 얼마나 오가며 달리였던가!

 70년대 조선족시리즈 

[70년대조선족] 1.그리워라 소시적 친구들아

[70년대조선족] 2.화룡2중 시절과 은사님들


력사학자 리광인   


리광인 (李光仁)  



리광인 프로필 (필명 리함)


▲ 길림성 화룡시 태생

▲ 1982년 연변대학 조문학부 본과 졸업

▲ 연변일보사, 연변력사연구소, 절강월수외국어대학 한국어과 교수로 근무하다가 퇴직.


저서 (30부)

《겨레 항일지사들》 (전6권)

《조선족력사문학연구문집》(전2권)

《광복전 겨레 작가론》

《홍군장령 양림》(평전)

《백포 서일장군》(평전)

《최음파평전》

《무정장군》(평전) 등


주요수상 

2006년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평론본상

2013년 “연변작가협회” 실화문학 대상(《》홍군장령 양림)

《홍군장령 양림》(평전). 2011년 중국작가협회 국가급중점작품지원프로젝트 획득

《무정장군》(평전). 2013년 중국작가협회 국가급소수민족중점작품지원프로젝트 획득 등


[부록] 리광인 저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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