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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호의 조선족력사강좌] 제93장 중화인민공화국 탄생

潮歌家族 潮歌网 2020-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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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력사 련재 

우리 력사 바로 알고 삽시다


김철호 저

제93장 중화인민공화국 탄생

주덕해 조선민족 대표해 천안문에 오르고
연변인민 떨쳐나와 공화국의 탄생을 환호

 개국성전

1949년 10월 1일. 이날은 중국인민에게 있어서 천지개벽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놓는 더없이 감격스로운 날이였다. 수도 북경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을 경축하는 성대한 기념대회를 가지게 된 것이다.

그날 중앙인민정부위원회의에서는 제1차회의를 열고 국가주석, 부주석의 명단을 선포하고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의 성립을 선언하였으며 주은래를 정무원총리 겸 외교부장으로, 모택동을 중국인민혁명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주덕을 중국인민해방군 총사령으로, 심균유를 최고인민법원 원장으로, 라영환을 최고인민검찰서 검찰장으로 임명하였으며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공동강령”을 “중앙인민정부의 시정강령”으로 한다고 결정하였다.

오후 3시, 수도 북경의 30만 인민대중은 천안문광장에 구름처럼 모여들어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을 경축하는 의식을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인산인해를 이룬 군중속에서는 무시로 우뢰와같은 환호성이 터졌다.

천안문성루에는 모택동을 비롯한 중앙정부의 요인들이 올랐고 관례대에는 여러 민족 대표들이 올라섰다. 그중에는 조선민족을 대포한 주덕해도 있었다.

국가의 주악속에 모택동은 국기게양대의 스위치를 눌렀다. 오성붉은기가 10월의 상공에 나붓겼다. 뒤이어 모택동의 우렁찬 목소리가 천안문광장에 울려퍼졌다.

“중앙인민정부는 성립되였다!”

“중국인민을 일떠섰다!”

격동의 목소리는 전파를 타고 중국대지를 진감하였으며 전 세계에 울려퍼졌다.

중국인민은 피어린 투쟁을 거쳐 빛나는 승리를 이룩하였다. 모택동의 장엄한 선포는 낡은 중국에 대한 결속의 선고였으며 제국주의, 봉건주의, 관료자본주의통치의 붕괴에 대한 선고였으며 백여년동안의 반식민지, 반봉건 사회의 결말에 대한 선고였다. 새중국을 창건하기 위해 중국의 조선민족은 다른 민족들과 함께 일제와 싸웠으며 국민당반동파와 싸웠다. 항일전쟁과 해방전쟁에서 조선인들은 피를 흘렸고 수많은 생명을 바쳤다. 때문에 오늘 조선인은 중화의 떳떳한 주인으로 되어 자신들의 대표를 당당하게 천안문성루에 세울수 있게 되었다.

이어 주덕총사령이 중국인민해방군의 지휘원과 전투원들에게 중앙인민정부 및 모택동동지의 명령을 견결히 집행하며 재빨리 국민당군대의 잔여부대를 숙청하여 아직 해방되지 못한 국토를 해방하라는 중국인민해방군 총부의 명령을 반포하였다.

이어 륙해공군의 렬병식이 있었다. 보무당당한 인민해방군 3군전사들은 름름한 모습으로 천안문광장을 주름잡았다.

이날 연길시 2만여명 군중들은 거리에 뛰쳐나와 경축모임을 가지고 “중화인민공화국만세!”, “중국공산당만세!”를 목청껏 웨쳤다. 집회에서 연변의 당정지도일군들은 열정에 넘치는 연설을 하였으며 모택동주석과 주덕총사령에게 보내는 축전을 채택하기도 했다.

“오늘 우리 연길시 5만명 여러 민족 인민들은 인민정치협상회의의 승리적페막과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의 탄생을 열렬히 경축하고있습니다. 갖은 고통과 압박을 받은 우리 중국사람들이 오늘부터 새로운 새대ㅡ인민민주독재의 시대에 들어섰습니다. 중국인민은 더는 제국주의와 반동파의 통치를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공산당, 모주석, 주총사령과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의 령도밑에 단결하여 생산계획을 견결히 완수 또는 초과완수함으로써 전국인민해방전쟁을 계속 지원하며 반동세력을 소멸하고 전 중국을 완전히 해방하기 위하여 독립, 민주, 평화, 통일 및 부강한 새 중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분투하겠습니다.”

이런 내용의 전보문은 그날로 전파를 타고 북경에 전하여졌다.

 나라가 섰다! 

아래에 저명한 민간문학가 리룡득선생의 “나라가 섰다!”는 제목의 글을 소개한다. 리룡득선생이 직접 겪은 일을 서술하고있는 이 글은 당시의 연변인민들의 뜨거운 정서를 충분히 반영하고 있다. 

내가 열살되던 해였다. 나는 편벽한 산골학교인 안도현 량병향 보광촌소학교 4학년생이였다. 10월 3일, 점심을 먹고 학교에 가 앞뜨락에서 한창 놀고있는데 사무실쪽으로부터 우리 반 담임선생님이 신문 한 장을 들고 다그쳐 오시며 소리쳤다.

“동무들! 우리 나라가 섰습니다!”

“뭐, 우리 나라가 섰다구요?”

나와 반 친구들은 일시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벙벙해 서있기만 했다.

“우리의 새 나라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되였소! 중화인민공화국이!”

“중화인민공화국? 어데요? 좀 보자요!”

나는 다른 애들을 제체놓고 선참으로 선생님한테로 달려갔다. 그리고 선생님 손에 쥐여져있는 동북조선인민보(10월 2일부 신문)를 빼앗다싶이 받아쥐였다. “중화인민공화국만세!”라는 대형 활자체와 그 아래에 모신 모주석의 초상화가 첫눈에 안겨왔다. 오른쪽 톱에 “중국인민정협 원만 성공리에 페막,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을 선고, 모택동 중앙정부 주석에 당선”이라는 큼직한 글자가 찍혀있었다.

“애들아! 우리 새 나라가 섰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되였다!” 친구들은 나를 빼곡히 에워쌌다.

“얘들아! 우리도 인젠 나라의 주인이 되었다. 얼마나 기쁜 일이냐!”

그날 오후 상과는 예상대로 진행될 수가 없었다. 나라 창립의 크나큰 기쁨에 휩싸인 선생님이나 우리의 심정은 모두 이 일 외의 다른 생각을 할수 없었던것이다. 하여 학교에서는 인차 전교사생(전교사생이라야 겨우 100여명)이 참가한 경축모임을 가졌다. 교장선생님은 격앙된 목소리로 중화인민공화국창건소식을 알리고나서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동무들! 우리는 인젠 어엿한 자기 나라가 있는 학생으로 되었습니다. 우리는 꼭 새 나라 어린이답게 학습을 잘해야 하겠습니다.”

 

뒤이어 교무주임선생님께서 장엄하게 신문독보를 하시였다.

“...부주석들로는 주덕, 류소기, 송경령, 리제심, 고강, 장란...”

이날 오후 산간벽지의 자그마한 운동장에선 오래도록 “중화인민공화국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날 집으로 뛰여간 나는 집문안에 들어서자마자 할머니와 어머니(당시 우리 집엔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나와 세동생이 살았다.)를 보고 소리부터 쳐댔다.

“할매, 멈마! 우리도 인젠 내 나라가 있게 되었어요!”

“아니 내 나라가 있게되다니?”

할머니와 어머니는 중뿔난 나의 말에 잠시 일손을 멈추시고 쳐다보셨다. 나는 낮에 있었던 일을 자초지종 얘기했다.

“응, 그런 일이였구나.”

주름투성이 할머니얼굴은 대뜸 환해지시였다.

“그래요. 우린 비록 이 몇 년간 자유해방속에 살았다지만 여태까지 나라라곤 없었지요. 그런데 인젠 당당한 내 나라가 있게 되어단 말이예요!”

나는 선생님한테서 들은 도리를 제법 내리 풀었다.

“참으로 기쁜일이로구나!”

어머니도 환성을 올리셨다.

뒤미처 동생들이 들어왔다.

“얘들아! 우리들에게도 인젠 나라가 있게 되었단다!”

그러면서 나는 동생들에게 오성붉은기를 그려보이면서 내 아는대로 제법 설명을 해주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때였다. 나는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지청구를 들이댔다.

“할매, 엄마, 돈 좀 줘요.”

“아니, 밤중에 갑자기 돈을 해선 뭘하니?”

“나라가 선 기쁨을 경축해야지 겠않어요?”

“참, 얘두, 우리끼리 어떻게 경축한단말이냐?”

“아니, 꼭 할수 있어요. 빨리, 응!”

나의 성화에 어머니는 200원(동북화페)을 고스란히 내주었다. 나는 공소사로 펄쩍 달려가 과자 두근을 얼른 사왔다.

“자, 이 한근은 우리 몫이고 이 한근은 동생들 몫, 우리 이 과자를 먹으며 새 나라 창건을 경축하자요!”

1950년 3월 20일, 동북조선인민보 제2면에는 우리 나라 국가가 실렸고 뒤미쳐 우리 학교에서는 국가를 배워주게 되었다.

 

일어나라 노예되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

우리의 피와 살로 새로운 장성 쌓자...

 

나는 학교에서 배우고 돌아오자마자 또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국가를 배워드렸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은 중국력사에서 천지개벽의 새로운 장을 열어놓았으며 우리 조선민족동포들에게도 새로운 삶의 앞길을 틔워주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된후 중국공산당은 민족압박제도를 철저히 페지하고 민족평등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중국의 조선민족인민들은 중화인민공화국의 대가정의 한 성원으로서 공산당의 민족정책의 빛발아래 다른 여러 민족과 함께 정치, 경제, 문화 등 면에서 평등한 권리를 향유하게 되었다. 조선민족인민은 정치적으로 아무런 권리도 없었던 자기들의 력사에 종지부를 찍고 오매에도 그리던 나라의 주인이 되어 국가대사와 지방사무관리에 참여하게 되었다. 

“항미원조 보가위국” 

그런데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된지 1년도 채 안되던 1950년 6월 25일, 조선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의 불길은 압록강과 두만강가에까지 퍼져왔다. 이웃나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위기에 처하여있었고 우리 나라의 안전이 엄중한 위협을 당하게 되었다. 이에 중국정부는 “항미원조 보가위국”의 구호를 내걸고 그해 10월 25일에 중국인민지원군을 조선전선에 파견, 조선인민군과 배합작전하여 북진하고있는 미군을 3.8선부근에까지 밀고나갔다.

이때 인민일보는 동북거류조선인이 조국으로 돌아가 조국보위전쟁에 참가하라는 보도를 계제하면서 조선인들의 참군열조를 불러일으켰다. 

北京에 거주하는 조선 교민은 집회를 열어 미제의 조선 침략을 반대하고, 이승만의 내전 발동을 질책하여 중국에 거류하는 우리는 반드시 힘을 다해 우리 조국의 동포의 인민해방전쟁이 승리를 거둘 때까지 지원할것이다.(인민일보 1951년 7월 12일 제1판 기록에서 인용) 

동년 10월 17일, 동북조선인민보의 보도는 다음과 같다. 

延邊大學 林民鎬副校長은 동북조선민족대표의 신분으로 중앙인민방송국의 초청을 받고 10월 14일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동북에 거주하는 조선 민족 인민은 모두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 인민들의 해방전쟁을 전적으로 지지한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 외교부 발언인의 중국에 거류하는 조선인들은 돌아가 조국을 보위할 권리가 있다는 광명하고 정대한 성명을 열렬히 옹호한다.”

 

이 담화발표는 중국조선인들에게 보낸 동원의 호소였다. 조선인들은 도시와 농촌에서 참군열조를 일으켰다. 부모가 자식을 전선에 보내고 새색시가 남편을 전선에 내보냈으며 학교학생들과 기관일군들이 전선으로 나가겠다고 탄원했다. 도문철도국에서는 선후로 500여명의 종업원들이 기관차를 몰고 조선전선에 나가 철도운수사업에 참가하였고 연변전원공서에서는 1000여명의 녀간호원을 양성하여 전선에 파견하였다.

항미원조총회에서는 전선을 지원하기 위하여 비행기와 대포를 헌납하라고 호소하였다. 각지의 조선인들은 호소에 적극 호응하여 “애국헌납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연변지구에서는 97억여원(낡은 화페)이나 헌납하였는데 이 돈으로 비행기 7대반을 살수 있었다.

항미원조전쟁중에서 “근근히 연변지구에서만 6만여명이 조선전쟁에 참군했으며 8천여명이 희생되였다.”(《중국항일전쟁과 조선족》고영일주필 도서출판 백암)

중국인민지원군은 조선인민군과의 2년 9개월의 협동작전 끝에 드디여 미군과 함께 정전협정에 서명하게 되였다.(계속. 지난호를 보려면 아래의 阅读原文을 클릭하면 됩니다)

 김철호의 조선족력사강좌 

우리 력사 바로 알고 삽시다

(1869~1952)


제1장 월강곡(越江曲)

제2장 간도(間島, 사이섬) 

제3장 고난의 조선인 간민(墾民) 

제4장 벼꽃향기  

제5장 피눈물의 지팡살이 

제6장 “간도협약” 

제7장 간도일본총령사관 

제8장 “간민교육회”와 “간민회”

제9장 서전서숙  

제10장 명동과 명동학교

제11장 룡정 "3.13"반일운동

제12장 "3.13"후의 반일무장단체들

제13장 15만원 탈취사건

제14장 봉오동전투

제15장 "훈춘사건"

제16장 청산리대첩 1

제17장 청산리대첩 2

제18장 청산리대첩 3

제19장 동부전선

제20장 경신년대학살사건

제21장 피로물든 장암동

제22장 연변에서 공산주의운동 흥기

제23장 학교가 공산주의사상의 온상으로

제24장 "제1차 간도공산당사건"

제25장 "제2차 간도공산당사건"

제26장 "제3차 간도공산당사건"

제27장 중공연변특별지부의 탄생

제28장 "붉은 5월 투쟁"

제29장 약수동쏘베트정부

제30장 약수동의 두 항일투사

제31장 "8.1"길돈폭동

제32장 간도농민폭동

제33장 추수춘황투쟁

제34장 항일무장대오건립을 위하여

제35장 "옹성라자사건"과 왕덕림의 구국군

제36장 동만항일유격대.1

제37장 동만항일유격대.2

제38장 동만항일유격근거지

제39장 제1차 반 "토벌"투쟁

제40장 반 "민생단"투쟁.1

제41장 반 "민생단"투쟁.2

제42장 반 "민생단"투쟁.3

제43장 반일통일전선 무어

제44장 제2차 반 "토벌"투쟁

제45장 일제의 집중영 "집단부락"

제46장 독립사의 출격

제47장 새로운 항일유격근거지 개척

제48장 경도선렬차습격전

제49장 동만유격근거지의 포기

제50장 로흑산전투

제51장 동북항일련군 제2군 건립

제52장 남북만으로의 전이

제53장 동북항일련군제1로군건립

제54장 장백으로의 진격

제55장 장백유격근거지의 개척

제56장 장백산기슭에서의 전투

제57장 로진창전투와 보천보전투

제58장 일제의 황민화정책.1

제59장 일제의 황민화정책.2

제60장 피눈물의 이민생활

제61장 "로령회의"와 "혜산사건"

제62장 고난의 행군

제63장 올기강전투와 천보산전투 

제64장 대사하전투와 한총령전투

제65장 홍기하에서의 대승리

제66장 엄혹한 시련속에서의 악전고투

제67장 쏘련에서의 야영훈련

제68장 연변에서의 소부대활동

제69장 적들의 심장속에 들어가.1

제70장 적들의 심장속에 들어가.2

제71장 연변이 낳은 불멸의 시성 윤동주

제72장 쏘련홍군 동북진격과 일제의 패망

제73장 민족운명의 갈림길에서

제74장 연변인민민주정권의 건립

제75장 조선의용군 제5지대

제76장 동만에서의 토비숙청투쟁

제77장 장춘해방전역에서의 "조선퇀"

제78장 소작료와 리자 인하 투쟁

제79장 주구청산투쟁

제80장 토지개혁운동

제81장 자위전쟁으로 승리전취물 보위

제82장 동북산야에 울린 승리의 노래.1

제83장 동북산야에 울린 승리의 노래.2

제84장 산해관 넘어 전국해방 전장으로 1

제85장 산해관 넘어 전국해방 전장으로 2

제86장 산해관 넘어 전국해방 전장으로 3

제87장 산해관 넘어 전국해방 전장으로 4

제88장 농민들 호조합작의 길로

제89장 교육 문화 예술의 주인으로.1

제90장 교육 문화 예술의 주인으로.2

제91장 교육 문화 예술의 주인으로.3

제92장 조선민족 건국대회서 정치권리 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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