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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백산"40돐특집] 겨레문단의 빛나는 거울 (림원춘)

림원춘 潮歌网 2020-09-15

조선족 사회




대형문학지 《장백산》창간 40돐 기념
나와 《장백산》


겨레문단의 빛나는 거울


림원춘



너무 거창한 이름을 달지 않았는지 아니면 너무 가벼운 이름을 달지 않았는지 신고하고 또 신고하다 40년이라는 길고 긴 주름을 잡은 장백산잡지사의 흐름을 보면 크지도 작지도 않은 마침한 제목이라 생각되여 이렇게 지울 수도 지워지지도 않는, 말 그대로 하야말쑥한 이름을 달았다. 자신의 창작생애를 통해서 크거나 작거나 많거나 적거나 글을 쓸 때 제목잡기가 가장 힘들다는 것을 새삼스레 되새기면서.


모르긴 해도 연변 문단에서 내가 제일 처음으로 《장백산》 잡지 창간호를 받아들지 않았나 싶다. 인연이라면 인연이랄가 연변대학 조문계(학부)를 졸업한 나의 마누라가 류하현조선족중학교에 배치받아 조선어문을 가르치고 있은 덕일 것이다. 하여 나는 짬만 있으면 류하현을 찾군 했었다. 그때 남영전은 학교 교원기숙사 제일 서쪽 단칸방에서 할머니를 모시고 한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어벌머리 크게도 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장백산》 잡지를 창간한 것이다. 심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정부의 후원을 받는 《연변문학》도 경제난으로 필묵을 아낄 때였는데 조선족 10여만 인구 밖에 없는 통화지구에서 무려 31만자에 달하는 대형문학간행물 《장백산》 잡지 창간호를 냈던 것이다. 기적이라면 기적일가, 그것도 류하현의 남영전과 집안현의 김택원 두 열혈청년의 손에서 발족되고 출간까지 됐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그때 그들은 문학에 대한 더없는 열정을 지니고 무일푼인 맨주먹으로 우리 겨레의 문화 발전을 위해 발벗고 나섰던 것이다. 세인들이 다 아는 바지만 길림의 《도라지》 잡지거나 할빈의 《송화강》 잡지는 문화관이라는 국가의 등을 업고 창간됐거나 목단강의 《은하수》 같은 잡지는 출판사라는 거대한 힘을 업고 출판됐지만 《장백산》 잡지는 문학애호가들의 힘으로 시작됐다는, 그들의 창발력과 굳은 의지는 그 누구도 엄두를 내지 못할 힘과 원동력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물론 후세의 작가들 모두가 잊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 《장백산》 잡지는 우리 민족을 놓고 말하면 유일한 대형격월간 성급 간행물이다. 우리의 작가들 모두가 《장백산》 잡지를 거치지 않은 작가는 거의 없는 줄로 안다. 그만큼 《장백산》 잡지는 작가들의 보금자리이자 작가들을 양성하는 훌륭한 배움터였다.


우리 민족의 독자들은 저명한 소설가 박선석 선생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중편소설 <털 없는 개> 등 중단편소설은 물론 장편소설 《쓴웃음》, 《재해》를 《장백산》에 발표했는가 하면 지금도 대하소설 <압록강>을 《장백산》 위챗계정에 련재하고 있다. 하여 우리는 그를 다정스럽게 ‘농민작가’라 부르고 있다. 그는 중국소수민족‘준마상’, 《장백산》 잡지 모드모아 문학상, 연변작가협회와 연변대학 과학기술대학에서 공동 주최한 ‘유스트문학상’까지 받은 우리 민족의 우수한 소설가이다.


내가 왜서 구구절절 박선석 소설가를 말하는가 하면 장백산잡지사가 없었다면 작가로서 박선석이라는 이름 석자가 없었을 것이다. 《장백산》 잡지는 이토록 한 작가를 양성하기 위해 많은 관심과 힘을 아끼지 않았다. 물론 《장백산》 잡지가 없었다 하여 박선석이라는 이름이 묻혀지지는 않겠지만 지금처럼 우뚝 뜨지는 못했을 것이다.


제1임 주필 남영전, 제2임 주필 리여천, 제3임 주필 안미영에 이르기까지 모두 박선석 선생의 뒤심이 되여 제집 문 앞 나들듯 그의 집을 직접 찾아가 이마를 맞대고 그의 작품에 대해 깊이 검토하고 창작과정에 부딪친 고민을 도와 해결하고 더 훌륭한 작품으로 다듬도록 수정의견을 제시해주고… 장백산잡지사의 도움으로 그는 한시도 창작고삐를 늦춘 적 없었다. 지금까지 한 작가의 성장을 놓고 20여년이라는 기나긴 시간과 심혈을 몰부은 편집부는 장백산잡지사 밖에 없는 줄로 안다. 실로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고 언제 어디서도 자랑스러운 우리 민족의 잡지사다.


나는 몇번 선석 아우(나는 그냥 이렇게 불렀다)와 함께 한 술상에 앉은 적 있다. 그때마다 선석 아우는 “장백산잡지사가 없었더라면 나는 언녕 죽었을 것”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사실 그랬다. 그가 만약 당시 조선족 작가들이 많이 모여사는 연변의 어느 곳에 살았더라면 혹시 장백산잡지사의 주목을 받지 못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따라서 그렇듯 큰 성과를 이루지 못했을 수도 있다.


나도 그렇다. “오는 정이 있으면 가는 정이 있다”고 많은 작품을 장백산잡지사에 보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빚진 마음도 마음이지만 작가들의 창작 정보를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있는 장백산잡지사의 눈길을 피할 길 없어서였다. 대형간행물로서 지면의 우세도 우세겠지만 “지금 모모 작품을 쓴다는데 잊지 말고 우릴 주십시오.” 하면서 동집게로 꼭 집거나 “지금 모모 제재가 필요합니다.” 하면서 튕겨주는 편집일군들의 사업태도가 더 우위이기 때문에 많은 작가층을 갖고 있지 않았는가 싶다.


언젠가 료녕성창작위원회에서 수풍만발전소 창작좌담회를 개최한 적이 있었다. 그 모임에서 나는 장백산잡지사 제2임 주필이였던 리여천 소설가에게 ‘작가도적’이라는 뒤숭 아닌 고운 별명을 달아준 적 있었다. 왜냐하면 창작좌담회거나 필회에 빠짐없이 참가하는 리여천 선생은 뒤로 살살 다니면서 작가를 만나고 작품을 부탁하고 하는 일들을 잊지 않고 꽁꽁 챙기기 때문이였다. 훌륭한 편집일군은 ‘앉은 편집’, ‘떠돌이 기자’의 특성을 다 갖춰야 마땅하다고 생각되여 나도 나서서 리여천 선생을 거들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공연한 소행인 같기도 하다. 


사실 나는 장백산잡지사의 덕을 입을 만치 입은 사람이다. 수십편에 달하는 중· 단편 소설을 제외하고 장편소설만 해도 《그날의 25시》, 《우산은 비에 운다》, 《산귀신》 등 수백만자에 달하는 장편을 세부를 련재했다. 나의 작품의 반은 몰라도 삼분의 일은 《장백산》 잡지에 발표하지 않았나 싶다. 참, 나와 인연이 깊은 잡지사다.


작가들의 선봉에 나선 《장백산》 잡지, 이렇게 일컬어도 과분한 찬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장백산》 잡지에서는 작가들의 작품을 대담하게 실어주었기 때문이다. 실은 대담하다기보다 작품에 대한 견해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를테면 정세봉 선생의 대표작 《볼쉐위크의 이미지》 같은 작품이다. 1991년 《장백산》 2기에 발표된 《볼쉐위크의 이미지》는 발표되자마자 독자들의 아주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누군가 당을 모독한 작품이라고 고자질할 줄이야? 하여 길림성위 선전부, 길림성출판국 등 해당 부문들이 동원되여 작품을 놓고 토론하는 데까지 이르렀으며 결국 ‘훌륭한 작품’이라는 결론을 받고야 일이 해결되였다. 만약 장백산잡지사의 정확한 투시력이 없었다면 <볼쉐위크의 이미지>는 땅속에 묻혔거나 아니면 언제 가야 해빛을 볼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장백산잡지사 창간 40주년을 기념하는 이런 경축의 날에 내가 이 걸맞지 않는 듯한 사례를 거론한 리유는 옳지 못한 비평태도와 편면적인 관점을 침질하기 위해서이다. 문학작품에 대한 정확하고 객관적인 비평은 우리 민족 문학의 건전한 발전에 도움이 될뿐더러 우리 민족이 더욱 각성되고 훌륭한 민족으로 부상하는 데 힘이 되여주기 바라기 때문이다. 


오늘까지 우리 《장백산》은 제3임 주필을 이어가고 있다. 제1임 주필 남영전 선생이 퇴역할 때도 그랬거니와 제2임 주필 리여천 선생이 퇴역할 때도 그랬듯이 나는 《장백산》 잡지가 그대로 활기찬 모습, 우리 민족의 얼을 생생하게 담은 작품을 보여줄 수 있겠는가를 은근히 근심했었다. 그런데 제3임 주필인 안미영 선생에 이른 오늘에 와서야 내 근심은 쓸데없는 로파심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박선석 작가에 대한 일관된 주목만 봐도 그렇다. 남영전 주필의 계주봉을 리여천 주필이 받았고 리여천 주필의 그 계주봉을 지금 안미영 주필이 받아쥐고 대하소설 《압록강》을 위챗계정에 련재하고 있다. 참 쉽지 않은 계주봉이요, 자랑찬 계주봉이다.


그 뿐 아니다. 《장백산》 잡지를 펼치고 작품의 목록을 훑어보면 로작가들의 이름도 뜨지만 많게는 생소한 작가들의 이름이 뜬다. 특히는 중· 장편 같은 중형작품에도 기억에 아리송하거나 생소한 작가들의 이름이 뜨고 있다. 참 기분 나는 일이다. 물론 나는 그 모든 작품들을 다는 읽지 않는다. 아니 읽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후배들이 배출한 ‘중형폭탄’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이건 다만 잡지 지면이 상대적으로 두터운 때문만이 아니라는 걸 오랜 편집자의 한 사람으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곧 편집자들의 심혈이며 노력의 결실이다.


《장백산》 잡지 창간호로부터 지금까지의 대형격월간 《장백산》에 이르기까지 40년의 년륜을 아로새긴 장백산잡지사는 우리 민족의 빛나는 거울로 되기에 손색 없다.


장백산잡지사 - 나의 보금자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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