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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닷컴] (회고)미전투기 폭격을 맞은 학교에서 공부하던 나날(렴광호)

조글로 潮歌网 2020-09-15

(회고) 

미전투기 폭격을 맞은 학교에서 공부하던 나날


렴광호



해방 후 전국적으로 미군 폭격을 맞은 학교는 아마 내가 다닌 소학교가 유일할 수 있다. 나는 어려서 길림성 화룡현 숭선소학교를 다녔다. 숭선은 두만강 상류에 위치한 중조접경 변경지역이다. 장백산과 직선거리로 백 여리 좌우 밖에 안 되니 당지 사람들은 하늘 아래 첫 동네라고 자랑한다.


숭선소학교는 토지개혁 때 당지 농민들이 정부의 방조아래 자체로 세웠다. 내가 다닐 때인 60년대 초 학교 규모는 매개 학년마다 50명좌우 한 개 반으로서 절대 대부분이 조선족학생과 교원이고 한족반이 오히려 소수였다. 전교 사생이 기껏해야 300명좌우 됐을 것이다. 하지만 숭선공사의 유일한 중심완전소학교였으므로 각종 실험도구와 교학설비들이 구전하였다. 


학교에서 매번 신입생 입학의식을 할 때 이 학교에서는 빼놓지 않는 교육내용이 하나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학생들을 데리고 학교 뒤에 있는 한 그루의 수양버드나무 아래로 가서 애국주의교육을 받게하는 것이었다. 


수양버드나무는 키가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줄기가 꽤 굵어 애들의 한 아름은 되었다. 나무주위를 바자로 둘러막고 커다란 널판자에 이 나무에 깃들인 사연을 소개하는 글을 써놓았다. 조선전쟁시기 어느 날 (구체적인 년도와 시일은 나는 기억 못하고 있다.) 미군 비행기 두 대가 갑자기 마을에 날아들더니 다짜고짜로 학교를 향해 미친 듯이 기관총 소사를 한 후 폭탄 두 개를 투하하였다. 그 중 하나가 학교를 명중하여 건물이 절반 무너지고 학교는 불길에 휩싸였다. 다행이 당시 학교 내에 사람이 없었기에 인명피해는 없었으며 투하된 폭탄 하나가 불발하여 더 큰 손해를 피면하였다고 한다. 


조선전쟁 전기,압록강을 넘어 통화지구를 기총소사하고 있는 미제전투기.자료사진


미군 비행기는 돌아가던 중 길가는 소수레를 향해서도 기관총 사격을 하였다. 수레를 몰던 농민은 재빨리 수레 밑에 숨어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소는 총에 맞아죽고 수레도 박살났다고 한다. 항간에서는 미군이 학교가 산밑에 있으니 군사기지인줄로 알고 폭격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하지만 연변의 다른 학교들과 마찬가지로 학교 앞의 아름드리 백양나무로 둘러싸인 널따란 운동장만 봐도 학교인줄을 미군이 모를 수 없었을 것이다. 폭격이 끝난 후 주민들이 달려와 불을 꺼버렸으며 그 후에 정부에서 학교를 다시 수건해 주었다.


화룡숭선 군함산. 아래 운동장을 가진 흰 건물이 학교(폭격맞은 위치에 재건). 


학교에서는 미제 침략자들의 죄행을 후대들이 잊지 않게 하기 위해 폭탄이 떨어진 자리에 수양버들을 심고 불발탄을 뇌관을 뺀 후 나무 옆에 전시해 놓았다. 매 번 입학하는 어린이들은 여기서 생동한 애국주의 교육을 받곤 했다. 그 뿐 아니라 6학년 교실에는 기관총사격을 맞은 칠판을 일부러 벽에 걸어두고 수업을 했다. 칠판의 오른 켠 위쪽에 소눈깔만한 구멍이 펑 뚫려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미군 전투기의 기관총 탄환이 꿰둟고 지나간 흔적이었다.


숭선소학교는 이처럼 전쟁의 피해를 겪어서인지 당시의 김덕립 교장 선생님은 덕, 지, 체가 겸비한 혁명후계자를 배양해야 한다면서 학생들의 근로 용감하고 어려서부터 로동을 사랑하는 정신을 키우는데 특별히 중시한 것 같다. 


1964년 모택동이 주석이 "농업은 대채를 따라 배워야 한다."라고 호소한 후 학교에서는 학교 뒤 군함산 밑의 돌밭을 개조하여 15무나 되는 제전을 만들어 농업 실험전을 꾸리고 반급마다 밭을 떼여주어 부치게 했다. 우리는 오전 수업을 마친 후 오후에는 주로 학교 실험전에서 일해야 했다. 그뿐 아니라 학교에서 과외 활동 서클도 꾸려 자기의 흥취에 따라 기상관측소조, 토끼사양소조, 누에양식소조 등에 참가할 수 있었다. 


나는 처음에 기상관측 소조에 들어가서 강우량, 바람, 날씨, 땅 온도 등을 기록하는 일을 배웠다. 얼마 후 집이 학교와 멀기에 기상관측에 불편하여 누에 양식소조로 옮겨갔다. 그때 학교에서 참나무 누에를 재배하였다. 이러자면 반드시 파릇파릇한 싱싱한 참나무 잎을 먹여야 했다. 그러니 결국 우리에게 차려진 영광스러운 임무는 매일 등교할 때 새로 돋은 지 얼마 안 되는 잎이 달린 나뭇가지를 한단 씩 학교에 메고 가는 일이였다. 이른 아침 등교 전에 이슬에 옷을 적시며 뒷산에서 참나무가지를 따서 4-5리 되는 학교를 지고 갔다. 


우리마을 한 학급에 나와 황송국, 렴응섭 등 남자애들만 다섯이 있었는데 누구도 군소리 한마디 없이 달갑게 한해 여름을 일했다. 누에는 일생 동안 다섯 번을 잠을 자는데 매번 잠에서 깨어나면 탈바꿈하여 몰라보게 컸다. 깨알만한 누에알들이 점차 자라나면서 손가락만한 크기로 되고 나중에 누에고치로 변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별 재미였다. 비록 고달팠지만 어려서부터 로동의 보람을 느낄 줄 알고 로동을 사랑하는 습관을 키우게 되였다.


1965년 4학년 후 학기, 하루는 반주임 전두국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와 우리들에게 대채의 진영귀 할아버지한테 편지를 쓰라고 하였다. 내용은 대채를 따라 배워 농업 실험전을 만들고 어떻게 농사일을 배우며 과학실험활동을 한다는 등이었다. 그 때 우리는 저마다 필기장에서 종이 한 장씩 쭉쭉 찢어 연필로 조선말편지를 써서 선생님한테 바쳤다. 물론 누구도 이 편지가 대채까지 부쳐간다고 믿지 않았으며 진영귀서기가 조선족 어린이들이 쓴 편지를 읽을 수 있는지 여부는 고려도 안했다. 


그런데 생각 밖으로 기적 같은 일이 생겼다. 대채의 진영귀서기가 직접 우리들한테 회답을 보내왔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옥수수, 콩, 조 종자도 함께 보내면서 우리들을 고무 격려해주었고 우리학교 농업 실험전을 <선봉농장>이라 명명하였다. 자료에 의하면 진영귀서기의 편지는 1965년 3월 31일에 숭선소학교에 도착하였다. 학교에서는 그 즉시로 전교 대회를 열고 우리 반을 <선봉중대>라 명명하였다. 나는 소선대 중대를 대표하여 결심 발표를 하고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선봉중대> 깃발과 대채의 종자를 전해 받았다. 


반주임은 우리 반 학생들을 옥수수, 콩, 조를 재배하는 세 개 소조로 나누어 대채의 종자를 심어 가꾸도록 하였다. 나는 옥수수소조에 배치 받았다. 우리는 종자를 심은 후 매일 학교에 가면 실험전부터 찾아보군 하였다. 오전 수업이 끝나면 저마다 자기가 맡은 실험전에 가서 물을 주고 김을 매며 북을 돋구고 비료를 준다 하며 분주히 보냈다. 그 시기에는 화학비료나 농약을 구경도 못했으므로 우리는 손으로 벌레를 잡고 비료는 집에서 돼지 똥이나 닭 똥을 가져다주었다. 인분이 비료로 좋다는 말을 듣고 우리는 자각적으로 학교 변소를 쳐서 인분을 비료로 주기도 했다. 


그 때 학급 반장인 장철식이 제일 앞장 서서 선줄을 끌었다. 후에 그는 연변주 공상국 국장으로 재직하다가 정년퇴직하였다. 정성이 지극하면 돌에도 꽃이 핀다고 가을이 되니 풍성한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우리가 가꾼 옥수수는 키를 훨씬 넘게 자랐고 방치 같은 이삭이 서너 개씩 달렸다. 제일 키 큰 옥수수를 학교 전람관에 전시했는데 무려 3메터 50 센치나 되었다. 당지에 이런 특이한 옥수수가 없었으므로 주위 농민들도 혀를 두르며 찬탄하고 대채 옥수수를 <말이빨 옥수수>라 부르며 저마다 종자로 남기고 싶어했다. 다른 소조에서 가꾼 대채의 콩도 머루알만큼 크고 조이삭도 어른의 팔뚝만큼 하였다. 


우리는 자신들이 직접 가꾼 풍년 소식을 진영귀서기한테 보고 드렸다. 진영귀서기는 그 바쁜 가운데서 우리한테 세 번이나 회신을 하여 칭찬해주었다. 전국의 몇 억이 넘는 소년아동들 가운데서 변강의 이름 없는 시골소학교 애들이 나라에서 명성이 뜨르르한 대채 당지부서기와 직접 편지를 주고받으며 친밀한 래왕이 있다는 자체가 빅뉴스였다. 그리하여 연변소년아동신문사에서도 기자 선생님들을 보내 우리를 취재했으며 나도 운이 좋게 평생 처음으로 <소년아동> 신문에 이름 석자를 올리게 되었다. 그때 기쁨이란 마치 하늘의 별이나 딴 듯 하였다.


숭선소학교에서 체육시간을 보는 것도 특별하였다. 학교 운동장은 잔디밭은 못 되지만 사질땅으로서 땅이 딴딴할 뿐 아니라 소낙비가 와도 질지 않아 운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흠이라면 넘어지기만 하면 팔 다리 피부가 벗겨지고 피를 시뻘겋게 흘렸지만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 학교 앞으로 흐르는 두만강과 바로 뒤에 있는 군함산은 자연 그대로 우리의 체육교실이였다. 


무더운 여름이면 체육시간에 두만강에서 수영을 배웠다. 그리하여 우리 고향 애들은 일여덟 살 때부터 두만강이나 올기강에서 제법 헤엄을 잘 했다. 그렇지만 시골에서 막 배운 재간이라 정작 시합에는 나설 수 없었다. 내가 연변사범학교에 다닐 때 체육선생님은 두만강변에서 온 우리들 몇몇을 찾아 학교에서 꾸리는 수영선수 선발경기에 참가해 보라고 했다. 우리 몇은 자신만만히 수영장으로 찾아갔다. 그런데 눈앞의 광경에 어리벙벙해졌다. 어려서부터 두만강이나 올기강의 거센 물결에 뛰어들어 자맥질하고 개헤엄부터 평영, 자유형,배영, 잠영 등을 배웠지만 누구도 다이빙할 줄은 몰랐고 또 고요한 수영장에서 수영해본 적은 없었다. 마치 초원에서 마구 뛰놀던 망아지를 갑자기 경마에 내보낸 격이었다. 우리 일행은 누구 하나 선발되지 못되고 기분이 후줄근해 숙사로 돌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나는 해수욕장에서 어린 시절 두만강에서 배운 수영재간을 뽐내군 한다.


우리는 소학교 때 겨울 체육시간에는 두만강에 가서 스케트를 타군 했다. 그 때면 조선 애들도 가끔 두만강에서 얼음지치기를 하였는데 우리들은 국경이 없이 아주 화목하게 잘 어울려 놀았다. 그 중 담 있는 애들은 사탕 따위를 서로 바꿔 먹기도 했다. 그리고 봄, 가을 체육시간에는 군함산 등반도 역시 빠질 수 없는 항목이었다.


어려서부터 이렇게 자라서인지 우리 고향 애들은 저마다 새끼호랑이처럼 용감하고 날렵했으며 못하는 일이 없었다. 사내애들이 열두 살쯤 되면 저절로 땔나무 하러 소발구를 몰고 산에 가는 일이 보통이었고 녀자애들은 방과 후 집일을 전부 담당하였다.


학교에서도 우리를 어린애로 보지 않았던지 마른일 궂은일 가리지 않고 시켰다. 5학년 여름방학에는 우리를 데리고 어른들도 힘들어 하는 이깔씨 부업을 떠났다. 마을에서 백여 리 떨어진 두만강 발원지 쪽으로 9호물동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날씨가 맑을 때는 장백산천지가 보인다는 장삼령이었다. 산속으로 들어갈 때에는 해방표 트럭에 앉아 비록 일하러 가지만 마치 려행이나 떠나듯 처음 자동차를 타보는 흥분 속에 우리는 온몸에 흙먼지를 뒤집어쓰면서도 내내 즐겁게 노래를 불렀다. 


9호 물동에 도착하여 우리는 어른들과 같이 풀과 나뭇가지로 대충 지은 초막집에 들었다. 밤이면 총총한 뭇별이 보이고 마른 풀을 깐 <침대>에서 잤지만 우리는 기분이 좋았다. 낮이면 3-4명 한 소조로 선생님들을 따라 이깔씨를 따러 산속으로 들어갔다. 선생님들은 이깔나무 위로 올라가서 이깔씨가 달린 나뭇가지를 긴 칼로 쳐서 떨어뜨렸고 우리는 아래에서 가지에 달린 이깔씨 송이를 따서 주머니에 담았다. 


나는 반주임 전두국 선생님을 따라갔었다. 어느 한번은 한창 일하는데 갑자기 소낙비가 쏟아졌다. 우리는 나무 밑에서 비를 피했지만 온몸은 이미 물병아리가 되었고 게다가 산속에 안개 낀 탓에 동서남북을 가릴 수 없었다. 길을 잃고 사처로 헤매던 도중 반주임은 산등성이에 벼락에 맞아 말라죽은 마른나무 강대가 서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두들겼다. 이윽고 맞은 켠 산에서 역시 나무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 나는 방향으로 찾아가서야 우리는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매일 산에서 돌아와 저녁을 먹으면 모두 일에 지쳐서 꼼짝 못했지만 이튿날에 또 다시 정신이 펄펄 나서 뛰어다녔다. 그리고 지금도 인상 깊은 것은 그때 두만강에는 해질녘이면 산천어가 얼마나 많던지 오그랑죽이 끓듯 했다.  낚시꾼 혼자서 한참이면 한 물통의 고기를 낚을 수 있었다. 


이깔씨 부업을 한 열흘쯤 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 우리를 마중 온다던 트럭이 오지 않아 걸어서 돌아 와야 했다. 더구나 자기의 이불 짐까지 메고 우리는 백여 리 길을 걸어와야 했다. 물론 나중에 광평까지 몇 십리 걸은 후에 트럭이 우리를 마중왔던 것이다. 그때 우리가 막 세는 나이 열두 살, 열세 살 정도였으니 지금 체육수업도 상할까봐 맘대로 못 본다는 어리광을 부리며 자라는 세대를 보면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수 없다. 아무튼 나의 소학교시절은 우리 동년배들이 다 그랬듯이 고생 속에서도 락천적으로 즐겁게 보낸 행복한 추억으로 된다.


우리 세대의 고향사람들은 어려운 환경과 고생을 락으로 여기며 굳센 의지를 키웠기에 인구가 3천여명밖에 안 되는 숭선공사에서 이른바 <출세>한 인물들이 꽤나 많았다. 연변 주와 각 현, 시에서 활약하는 국장, 서기, 시장, 현장, 처장 등 요직을 맡은 분들도 있었고 기층 단위의 령도로 활약하는 사람들도 수두룩하였다. 그리고 국내 곳곳에서 고향을 위해 이름을 떨친 전문가, 교수, 기업인들도 적지 않다. 이것이 바로 우리 고향 숭선소학교의 훌륭한 교육의 덕분이라 할 수 있겠다.


조글로 문학닷컴 2020.6.2발표


렴광호


원 연변대학 조문학부

조선어강좌 강좌장

석사지도교수


전 청도대학 

한국어학부 교수


렴광호  작품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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