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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철국 장편스포츠실화] 챔피언 1965 (6) 스승의 마음/문제는 어디에?

조글로 潮歌网 2020-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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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일련재


 신철국  장편스포츠실화 

-1965년 길림성축구팀 전국축구 갑급팀련맹경기 우승 실록


연변인민출판사


스승의 마음

연길 도심을 남북으로 나누어놓은 부르하통하는 속절없이 출렁이고있었다. 수초가 우거진 강기슭에는 낚시군 몇이 띄염띄염 널려 앉아 열심히 “세월을 낚고”있었다. 서쪽 하늘가를 불그스레 물들이는 노을 한자락이 출렁거리는 물결우에 비껴 어리광을 치고있었다.

“휴-”

출렁이는 물결을 타고 시원하게 전해오는 강바람은 오히려 시름 깊은 사나이의 마음에 우수만 더해준다.

“자네 여기 와있었군그래.”

홀연 등뒤에서 들려오는 귀에 익은 목소리에 박만복은 고개를 돌렸다.

기름한 얼굴에 다부진 몸매를 가진 중년남자가 조용히 미소를 짓고있었다.

“아니, 박비서장님이?”

연변축구협회에서 비서장으로 근무하고있는 조선족축구계의 원로 박로석 1) 선생이였다. 1953년, 상해에서 있었던 전국 11개 도시 청년축구운동대회에서 연변청년팀의 지휘봉을 잡았던 박로석 선생이였다.


1) 1940년대에 위만주국축구팀 주력으로 활약했던 박로석은 1951년, 전국체육총회 연길현(현재의 룡정시)분회의 부주임으로 사업하다가 1952년 11월부터는 연변조선족자치구 문교처에서 체육행정사업을 주관했다. 1956년, 그는 전국축구심판위원회 위원으로 당선되였고 1957년에 연변축구협회가 성립되자 1986년까지 줄곧 축구협회 부주석 겸 비서장 직을 겸임하였다. 그는 1994년 11월 5일, 향년 76세로 별세했다.


“음, 그냥 앉아있으라구.”

스적스적 박만복의 옆으로 다가온 박로석은 자갈을 하나 골라쥐더니 이윽히 강심을 응시했다. 꾹 눌러쓴 캡의 채양이 날카롭게 전방을 향하고있었다. 그밑에서 정기 도는 두눈이 어글어글 빛났다. 순간, 허리를 휘우듬하는것 같더니 오른손이 휘익하고 사선을 그었다. 그와 동시에 화살같이 손아귀에서 벗어난 돌은 마치 신이라도 들린듯 탐방탐방 수면우를 재주껏 뛰여가더니 이윽고 휘주근히 맥을 놓으며 물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때 대안에 있던 낚시군 하나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다시 그랬다가는 큰일날 줄 알라는듯 이쪽에 대고 냅다 주먹질을 해댔다.

“허허, 인젠 솜씨가 예전 같지 않네. 늙었다는 얘긴가? 허허.”


중국조선족축구계의 거목 박로석(좌)과 최동현(우).


박로석은 미안했다는 제스츄어로 건너쪽에 손을 들어 둬번 흔들어보이고는 박만복의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지그시 강심을 응시한채 손에 묻은 흙을 툭툭 털며 지나가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황주임한테… 장부성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더군.”

“예? 장문해 부성장 말입니까?”

박만복이 꿈틀했다.

“아마 우리 길림대의 강등사태를 놓고 황주임이… 말을 좀 들은것 같아.”

“아!…”

박만복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1962년 7월, 박만복이 길림성축구팀의 지도로 부임하던 날 장문해 부성장은 친히 장춘기차역까지 마중을 나왔었다.

“환영하네, 환영해! 젊은이가 웽그리아에서 축구를 배웠다고 들었네. 이제 어디 한번 본때를 보여주게나. 자넨 조선족이라고 했지.

조선족은 워낙 축구를 잘하기로 소문이 나지 않았던가. 해방전에 북경에서 활동하던 북평연우축구단 1) 도 대단했었는데… 자네를 보니 벌써 내 어깨에 힘이 막 생기는구먼. 하여튼 잘 왔네, 잘 왔어!”

그러면서 27세 애숭이의 어깨를 정답게 도닥여주며 특별환영1) 1938년, 북평(오늘의 북경)에서 리영순 등 10여명의 후원자들에 의해 세워진 축구팀이

다. 조선인들로 구성된 이 축구팀은 북평축구리그전에 참가하여 세번이나 우승을 따냈다. 1942년 5월, 북평축구대회가 있은후 문사철 등 2명이 중경에 있는 대한민국림시정부의 련락원과 내통한 사실이 일제특무기관에 발각돼 이를 빌미로 연우축구단 선수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자 일부 선수들이 체포되고 연우축구단도 결국 해산되였다.



만찬까지 베풀어주었었는데…

“장문해 부성장이 축구에두 상당히 관심이 많은것 같던데. 저,북경에 있는 체육공작대 장주임하구는 대관절 어떤 사이지?”

“장청계주임 말입니까?”

“그래.”

“그분하고는 해방전에 북경에서 같이 지하혁명을 한 전우라고 합디다.”

“오-”

이들과 마찬가지로 박로석에게 있어서 박만복은 사업동료이기전에 우선 “전우”였고 제자이기도 했다. 그러니 “전우”로서, 스승으로서의 박로석도 언제부터인가 만복의 이번 실패와 그로부터 겪고있는 시련에 대해 은근히 속을 썩이고있는중이였다.


국가체육운동위원회에서는 웽그리아에서의 축구류학을 마치고 귀국한 중국청년대표팀을 국가대표팀으로 승격시키고 홍팀(红队)과 백팀(白队)으로 갈랐다. 그뒤 홍팀은 북경팀에, 백팀은 천진팀에 귀속시켰다. 국가적차원의 시합이 있을 때면 소집하여 합숙훈련을 하고 평시에는 두 팀에 내려가 국내시합에 참가하는것으로 훈련을 대체한다는 계획이였는데 그것이 후날 두 팀의 악연에 빌미가 될줄이야.


사실 최근년간 격화되고있는 중국슈퍼리그의 두 앙숙-북경팀과 천진팀 사이의 악연은 어찌 보면 그때로부터 시작된것이나 다름없었다. 50여년전 중국축구의 2대산맥을 이루었던 홍팀과 백팀이 국내축구시합에서 북경팀과 천진팀을 대표해 자주 나서군 했는데 그때면 왕왕 “진짜 국가팀은 누구냐?”는 자존심대결로까지 이어지기가 일쑤였다. 그도 그럴것이 이 두 팀에 당시로서는 국내축구계의 최고를 표방하던 국가대표팀 선수들이 가장 많이 포진해있었던것이다. 그러던것이 나중에는 아예 두 팀의 선수들만이 아닌 두 고장 축구팬들의 자존심대결로까지 이어지게 된것이다…


우익방어수로 출중한 공 차단 및 통제 기술과 능숙하고도 정확한 먼거리슛으로 불의의 공격을 조직하고 거기에 또한 폭발력이 강해 안베르 웨피브 지도로부터 “분사식비행기”라 불렸던 박만복은 그때 홍팀에 편입되였다. 국가체육운동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잠시 북경팀에 적을 옮긴 박만복은 팀이 1957년, 전국축구 갑급팀련맹경기 우승과 1959년, 제1회 전국경기대회 축구경기에서 3등 을 따내는데 마멸할수 없는 기여를 했다. 그 자신 또한 1957년, 중국에서 처음으로 건장제를 실시할 때 중국축구계의 17명 동료와 함께 건장칭호를 수여받았었다. 중국조선족축구인들가운데서 최초로 말이다. 하지만 하늘의 풍운조화는 예측할 길이 없었다.


1957년 월드컵 아시아지역 예선시합에 중국대표선수로 참가한 박만복(좌 1).


1958년 10월 10일, 박만복에게 있어서 가장 지울수 없는 불행한 사건이 터졌다. 그날, 남경 오대산에서 훈련중이던 국가팀과 기관차팀이 평가전을 치렀는데 그만 그 경기에서 박만복은 정갱이 큰 뼈가 끊어지고 작은 뼈에 금이 가는 대형부상을 입은것이다. 즉시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당시의 의료환경이 렬악해서 지금처럼 과학적이고 선진적인 치료를 받을수가 없는 형편이였다. 후에 박만복은 결국 그번 상처가 덧나 때이르게 선수생애를 접게 되였다. 사고를 당했던 그때 인편으로 소식을 전해들은 박로석은 크게 상심했었다.


연변 시골에서 기적과도 같이 축구의 강국 웽그리아에 가서 세계축구의 정수를 배워온 조선족축구계의 재목이 너무도 때이르게 부러지는것이 아닌가 근심하며…


그러던 박만복이 병상에서 일어나 1958년 중순부터는 북경팀 조리지도 겸 선수로 다시 뛰게 되자 박로석은 속으로 무등 기뻐했었다. 더우기 박만복이 1960년부터 북경청년팀의 지휘봉을 잡자 내심 쾌재까지 불렀었다.


(그렇지! 만복아, 이제 다시 멋들어지게 해보는거야!)


그런데 그 만복이가 연변에 오게 되자 박로석은 더욱 기뻐 어쩔줄을 몰랐었다. 중국올림픽위원회가 국제축구련맹으로부터 퇴출1) 하여 국제축구와의 교류가 거의 단절된 이때 세계축구강국으로부터 선진적인 기술을 배워온 이 제자가 이제 다른 팀들로부터 기술이 약하다고 비난을 받던 길림성축구팀을 일약 나래 돋친 장백호랑이로 둔갑시킬것만 같았기때문이였다.헌데…


1) 1958년 6월 1일, 중국올림픽위원회는 국제축구련맹이 이른바 “두개 중국”을 조작해내는 행위에 항의하여 국제축구련맹으로부터 퇴출을 선포했다.

 


문제는 어디에?


“전번 자네가 구사했던 그 ‘424’전술이 브라질에서 나온거라며?”

잠자코 수면을 바라보고있던 박로석이 침묵을 깼다.

박만복은 말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424”시스템, 그것이 세계축구무대에서 류행되고있는 최신전술이라고 하여도 승리는 분명 전술 하나에만 의거하는것이 아니였다. 축구에서의 전술이란 고정된것이 아니라 경기내용에 따라 수시로 바뀌기때문이였다. 게다가 선수들의 억센 투지와 끈질긴 인내력을 필요로, 우선적으로 요구하는 이 전술에 있어서는 더구나 그러했다.


1863년 10월 26일, 런던에서 세계적으로 처음으로 되는 축구운동기구인 영국축구협회가 설립됨으로써 영국은 사실상 현대축구의 발원지로 등장했다. 당시 그들이 제정했던 축구규칙은 모두 14개 조목이였다. 그들은 경고와 축출 등 책벌이 없는 상태에서 열심히 축구운동을 전개해나갔다. 그러다가 1904년 5월 21일, 프랑스, 벨지끄, 에스빠냐, 화란, 단마르크, 스웨리예, 스위스 등 7개 나라의 축구협회 대표들이 빠리에서 회의를 열고 축구운동의 국제적조직인 국제축구련맹 1) 을 내왔다.


1) FIFA. 초대 회장은 프랑스사람 로베르트 귀에린이다.


현대축구는 대략 19세기말, 20세기초에 서방으로부터 중국에 전파되였었다. 당시의 향항과 상해는 중국에서 처음으로 개척한 현대축구운동의 거점도시였다. 그후 남경, 천진, 북경 등 도시와 일부 교회, 학교들에서 축구운동을 전개했는데 1904년부터 1908년 사이에는 향항, 북경, 상해 등지에서 축구시합을 대대적으로 벌이기도 했다. 잇따라 광주, 무한 등 도시들에서도 축구운동을 대폭 전개했다. 특히 1908년, 향항에서 중국 현대축구사상 최초로 되는 축구팀인 남화축구팀(南华足球队)을 내옴으로써 전술체계가 박약하고 기술적으로도 따분했던 중국축구가 비로소 생기를 띠게 되였다. 그들이 서방의 축구강국들로부터 처음 인입해들인 “WM(3223)”시스템이 바로 그것이였다.


“‘WM’전술은 공격수, 앞뒤 방어수간의 거리를 동일하게 배치해 배합과 련락이 긴밀해지도록 한것이 좋아. 특히 세명으로 구성된 수비진에 명확한 방어구역이 형성되여 각자의 주요 대상을 분공해 지키도록 하게 하는…”


“그렇지요. 시합에서의 공격력량과 방어력량을 균일하게 강화시켜서…”

초창기 옵사이드규칙은 공을 받을 공격자와 상대방 꼴라인사이에 상대선수 3명 이상이 존재해야 패스가 가능토록 했다. 하지만 옵사이드규칙은 1925년에 이르러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상대선수 3명에서 2명으로 변경된것이다. 이러한 옵사이드의 완화에 따라 두명의 수비수만으로는 상대방의 공격을 봉쇄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래서 고안된것이 바로 “WM”시스템이다.

“그 전술이 영국에서 나왔다고 했지?”

“네. 영국인이 고안해낸거랍니다. 50년대초까지 류행되다가 ‘4명공격수’전술이 나와서…”

“그렇지. 50년대초에 웽그리아가 수비의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 공격할 때 중앙공격수는 뒤로 들어오고 좌내공격수와 우내 공격수는 앞으로 나가고, 그래서 4명 공격수를 두게 된 MM(3232)전술이지.”


20세기 초엽, 세계 각국의 축구팀들은 너나없이 영국인 허버트 채프먼(1878—1934년)이 고안해낸 “WM”시스템을 채용했는데 이 시스템은 무려 30여년이나 세계의 축구무대를 지배해왔다.


1923년, 오스트랄리아 원정경기에서 기념사진을 남기고있는 향항 남화축구팀.


해당 시스템은 경기장에서 전술대형이 분명하고 각자의 위치분공이 명확하여 공격시에는 수비수들이 휴식하고 수비시에는 공격수들이 숨을 돌릴수 있어 당시 축구수준에 안성맞춤이였다. 하지만 1950년대초에 웽그리아에서 4인공격진을 이룬 “MM”시스템을 적용하면서 “WM”시스템은 일거에 무너지고말았다. 그들은 중앙공격수를 뒤로 떨어지게 하고 좌내공격수와 우내공격수를 좌익공격수와 우익공격수와 함께 앞에 나서게 한 동시에 기동령활한 위치교체와 능숙하고도 변화무쌍한 련락으로 “WM”시스템을 무력화시켰던것이다. 원체 3명의 방어수로는 도저히 막아낼수 없는 막강한 공격이 무차별적으로 이어졌는데 그전까지만 해도 세계 최상의 전술이라고 칭송받던 “WM”시스템은 “MM”시스템에 무참하게 유린당하고말았다. 이제까지 견고하다고만 믿어왔던 상대적인 균형이 일거에 깨져버리고만것이다.


“그다음 고안된것이 ‘424’전술입니다. 측면수비 두명까지 총 8명이 공격에 가담하며 상대 수비진을 무력화시키는 시스템이지요.”

“그게 브라질에서 만든거라고 했지?”

“네. 50년대 후기에 브라질축구팀에서 ‘4명공격수’전술의 우점을 흡수하여 원 중앙공격수를 중앙구역 공방수로 들여오고 반면 공방수 한명을 뒤방어선의 중앙방어수로 내세운…”

“근데 이 전술이 퇴각하고 공격하는 속도가 빨라 볼 멋이 있긴한데 선수들에 대한 요구가 너무 높잖은가?”

“중간구역에서 두명으로 구성된 중앙공방수가 보조공격과 수비라는 이중책임을 져야 하기에 그렇긴 합니다. 그래서 중간구역의 력량을 강화하기 위해 수시로 한명의 내공격수를 불러들여와 중앙선 공방수로 내세우는 ‘433’전술로 변화를 시도해보기도 했었는데…”


“그쯤하면 전술문제는 아닌것 같고… 도대체 뭐가 문제였지?”

박로석이 와락 캡을 벗더니 신경질적으로 뒤더수기를 썩썩

긁적이기 시작했다. 미간에 굵은 내천자가 깊게 패여져갔다.

(계속)


[신철국 장편스포츠실화] 챔피언 1965

(1) 봉변

(2) 기회의 신

(3) 결심

(4) 출국/류학


신철국

작가

【신철국 작가 프로필】

1971년 왕청현 하마탕향 전하촌(汪清县蛤蚂塘乡前河村)출생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 졸업


연변민족문학원(제1기/1994년), 로신문학원(제30기중청년고급연구토론반·아동문학/2016년) 수료.


‹중국조선족백년실록›집필위원회 위원(스포츠) 력임.


연변텔레비죤방송국 청소년부, '흑룡강신문','길림신문'에서 다편간 편집, 기자로 활약. 연변작가협회 회원.


1986년 아동소설 '신방주인'으로 등단.


'화신문학상','압록강문학상','흑토문학상','연변라지오문학상','상익컵 실화문학상' 등 수상경력 다수. 


단행본 장편스포츠실화 ‹챔피언 1965› 출간.


공저로 ‹60주년에 만난 60인›, ‹중국조선족백년실록›, ‹연변축구의 발자취를 찾아서› 등이 있음.


현재 명동문화예술원 부원장 겸 글짓기지도로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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