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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철국 장편스포츠실화] 챔피언 1965 (8) 맨발의 선수/첫발자국

조글로 潮歌网 2020-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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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일련재


 신철국  장편스포츠실화 

-1965년 길림성축구팀 전국축구 갑급팀련맹경기 우승 실록


연변인민출판사


맨발의 선수


1956년 10월 27일, 북경 선농단체육장 1) .


1) 선농단체육장(先农坛体育场), 중화인민공화국 초대 국가주석 모택동이 현장에서 관람한 유일한 국제축구경기가 바로 이 경기장에서 펼쳐졌었다. 1955년 10월 30일, 중국대표팀과 쏘련을 대표한 제니트팀과의 경기가 펼쳐졌는데 그번 경기에서 조선족선수 김룡호가 중국팀을 대표해 공격수로 나섰다. 그는 후반전 결속무렵, 중국팀이 1대2로 끌려가고있을 때 관건적인 동점꼴을 터뜨려 팀이 2대2로 무승부를 내는데 크게 기여했다. 당시 주석대에 앉아있던 모택동은 만면에 미소를 지었고 경기 결속후 특별히 그번시합에 참가한 선수들을 찾아 격려했다고 한다. 당시 중국팀이 상대한 제니트팀은 쏘련 갑급리그에서 4위를 기록하고있던 강팀이였다.


물샐틈없이 빼곡하게 들어찬 관중석이 “왕청팀 힘내라!”, “금현팀 힘내라!”는 응원소리로 요란한 가운데 그라운드에서는 두 팀의 선수들이 그 응원소리를 등에 업고 한창 치렬한 공방전을 벌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해 년초, 국가체육운동위원회에서는 국내 축구운동수준을 제고할 목적으로 전국의 2천여개 현(县)중 축구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고있는 8개 현의 축구팀을 수도 북경에 불러 10월 27일부터 11월 7일까지 축구선수권대회를 가지기로 했던것이다. 이날이 바로 대회 첫날이였고 그 개막전을 왕청현팀과 금현팀이 펼치고있는중이였다. 헌데 그 8개 팀을 볼작시면 참으로 가관이였다. 료녕성의 금현(金县)팀과 광동성의 매현(梅县)팀을 제외한 나머지 여섯개 팀 모두가 조선족선수들로 구성된 축구팀이였으니 말이다. 특히 그중에서 흑룡강성에서 온 조선족축구팀인 녕안팀(7등)을 빼면 나머지 다섯개 팀은 전부 연변에서 온 축구팀이였다.


그 팀들로는 연길현팀(1등, 지도 마금춘), 안도현팀(3등, 지도 홍철), 왕청현팀(4등, 지도 강원문), 훈춘현팀(5등, 지도 채기문), 화룡현팀(8등, 지도 박상혁)이였는데 이들 5개 현 축구팀의 총 인솔자가 박로석이였다. 이중에는 시골에서 올라온 우수한 농민축구선수들도 적지 않았다.


“아니, 저놈 봐라.”

“어디서 저런 눔 나왔어?”

“히야, 저 녀석 발가락이 단단한데!”


경기초반부터 관중석의 눈길은 일제히 왕청현팀에 쏠리고있었다. 중앙공격선에서 일단 공만 잡았다 하면 멋들어진 드리블로 질풍같이 상대방의 문전에 당도해 탕탕 슛을 찔러대는 작달막한 키꼴의 사내가 너무나도 희한했기때문이였다. 류별나게 축구화도 신지 않고 맨발로 그라운드를 주름 잡는 선수 1) , 곱슬곱슬한 양머리에 정기 도는 두눈, 다부진 몸매…


바로 그 맨발의 16번 선수가 출중한 표현으로 관중들에게 절묘한 장면들을 련달아 선물하고있었던것이다. 당시 축구의 고향이라고 떵떵거리던 광동성의 매현팀이였지만 그 축구팀은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어디에 붙었는지도 잘 모르는, 소위 “범박골”이라 부르는 연변의 시골 왕청현의 축구팀한테 엉망진창 조지고있었다.

경기초반 중원에서부터 공을 잡자 바람에 단창필마로 적진 깊숙이 파고들어가 삼대 베듯 적장들을 료리하는 상산 조자룡같이 매현팀의 수비수들을 스리슬쩍 따돌리며 문전까지 돌입한 맨발의 16번 선수.


1) 당시 경기에 출전하는 선수는 반드시 신을 신어야 한다는 명확한 규정이 없었고 동경춘 자신 역시 그냥 맨발로 공을 차는쪽이 더 편했었다고 한다. 잔디를 심지 않은 흙모래 그라운드에서 맨발로 뽈을 찼다는것은 그야말로 전설같은 이야기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실이였다.



“야- 잘한다!”

“그렇지, 멋지다!”

찰나, 전체 관중석이 떠들썩하니 끓어번졌다. 문지기와 1대1의 상황에서 힘차게 슛한 공이 그만 문대우를 스쳐지나고만것이다. 매현팀은 급기야 비상조치를 들이댔고 전문수비수를 투입해 맨발의 16번 선수를 지키도록 조치했다. 바로 왕청현팀의 공격의 핵을 동결시키려는 시도였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손처럼 공을 다루는 현란한 발재주에 총알같이 빠른 속도를 앞세우고 거기에 또

몸을 던지는 투혼으로 관중들을 흥분의 도가니에 빠뜨리는 16번 선수.


드디여 경기 결속 6분을 앞두고 멋들어진 결승꼴이 터졌다.

거침없는 단독질주로 마냥 매현팀의 문전을 괴롭히던 왕청팀의 그 16번 선수가 매현팀의 꼴문 정면 30메터 구역에서 교묘하게 대방 수비수 2명을 따돌리며 함께 따라들어온 왼쪽 측선 동료한테 패스를 했다. 그리고 쏜살같이 문전으로 돌입했을 때 마침 왼쪽 측선에서 동료가 넘겨준 공이 그의 앞으로 날아왔다. 그때라는듯 16번 선수의 맨발이 전광석화처럼 번뜩였다.


“와아-”

공은 문대 왼쪽모서리를 때리며 힘차게 그물에 출렁 걸렸다.

“1대0!”

전국 8개 현 축구선수권대회 서전(绪战)을 왕청현축구팀이 승리로 장식하는 순간이였다.

경기 결속후 당시 국가체육운동위원회 주임이였던 국무원 부총리 하룡원수가 친히 왕청현팀의 그 맨발의 16번 선수를 찾았다.


“이름이 뭐지?”

“동경춘입니다.”

“동경춘? 음, 경치 좋은 봄이라… 옳아, 그래서 ‘제비’가 나타났군그래. 하하하…”

이때로부터 “제비”라는 별호로 20세기 60년대 길림성축구팀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팀의 간판공격수 동경춘.

원적: 길림성 왕청현 쌍하향 쌍하촌.

생년월일: 1937년 4월 27일(2014년 작고).

항렬: 4남중 셋째.

위치: 공격수.

신장: 1.66메터.

체중: 70킬로그람.

속도: 11.6초/100메터


소학교시절부터 1955년에 흥당련합중학교(兴塘联合中学, 지금의 왕청현 대흥구중학교 전신)를 졸업할 때까지 학교축구팀 주장으로 활약하며 줄곧 맨발로 공을 다루면서 천하의 무쇠발톱을 키워왔던 동경춘, 축구공이 흔치 않던 세월, 주머니에 쌀겨와 모래를 뒤섞어 다져넣고 열심히 굴리던 애시적의 동경춘이 어느새 우수한 기량을 닦아 전국 8개 현 축구운동대회에서 이름을 떨치게 된것이다.



공 다루는 재주도 특출했지만 운동장에서의 출중한 속도는 더구나 많은 사람들이 혀를 내두를 지경이였다. 천부적인 신체소질을 바탕으로 한 끈질긴 노력의 소산이였다.


중학교시절 계몽스승 신병권 1) 선생의 문하에서 공다루기와 더불어 달리기, 너비뛰기, 높이뛰기, 장애물경주를 련마하면서 축구란 모든 운동의 종합체라는 사실을 뒤늦게야 의식하며 후둑후둑 떨어지는 비방울 같은 구슬땀을 드넓은 운동장에 휘뿌렸던 동경춘이였다.


1) 1951년, 동북국로동자축구선수권대회 연변팀 대표선수. 1950년대에 왕청현 흥당련합중학교 체육교원으로 사업. 1998년에 76세를 일기로 사망.


동경춘의 가정은 영광스러운 혁명렬사유가족가정이기도 하였다. 그의 큰형 동경학은 1946년에 참군하여 사평, 장춘, 공주령전투에 참가하였고 1950년에 조선전쟁에서 미군의 함포사격에 희생되였으며 둘째형 동경록은 1946년에 참군하여 사평전투에서 장렬히 희생되였다. 하다보니 항렬로 셋째였던 동경춘이 결국에는 집안에서 맏이노릇을 해야 했다.


동경춘(좌)과 정지승(우).


“우리 집안은 영광스러운 렬사가족이다. 그러니 어찌 나라의 배려에만 손을 내밀고있겠는가. 사나이로 태여난 이상 나도 뭔가 보답해야 하지 않겠는가. 축구, 그렇다. 나의 장기, 그게 바로 내 출로이다. 꼭 훌륭한 선수가 되여보리라.”


동경춘이 축구에 발 붙이게 된 동기이자 지향한 목표였다.

그래서인가, 천년락수가 바위에 구멍 내듯이 고심참담한 노력은 과연 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1957년 4월 10일, 그러니까 전국 8개 현 운동대회에서 이름을 떨치고 돌아온 이듬해, 동경춘에게 연변청년축구팀 선수로 선발되였다는 기꺼운 소식이 날아들었던것이다.


아아, 드디여 축구인의 생애가 시작되는것인가!


첫발자국


1957년 7월 28일, 연변청년축구팀 8번 유니폼을 입은 동경춘은 천진시에서 개최된 전국 12개 지구 청년축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하여 또 한번 세인들을 경탄케 했다. 맨발의 선수—연변팀의 8번 선수라면 누구의 입에서든 수시로 탄성이 튕겨나왔다. 그도 그럴것이 매 껨마다 상대방의 꼴문을 작렬시키는 꼴잡이 “수훈갑(훈장을 받을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한 갑이라는 뜻의 스포츠신조

어)”이였고 무한팀과의 겨룸에서는 혼자서 꼴을 다섯개나 넣는 진기록까지 세웠으니 말이다. 소조에서 손쉽게 몸을 뺀 연변팀은 나중에 천진팀과 최후결승권을 다투게 되였다.


경기시작부터 국내 강팀인 천진팀은 홈장의 우세까지 발휘하여 연변팀에 맹렬한 공격을 퍼부으며 경기의 주동권을 잡으려했다. 거기에 못지 않게 연변팀도 방어반격을 위주로 완강히 대항했다. 동경춘도 예나 다름없이 중앙공격선에서 좌충우돌하며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있었다. 사전에 연변팀의 공격의 핵인 동경춘을 위험인물로 점 찍어둔 천진팀은 동경춘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곤두세우고있었다. 그 눈치를 모를 동경춘이 아니였다.


공도 오지 않는데 후닥닥 내뛰여 왼쪽 측선에 가서 활동하는가하면 때로는 천천히 “꼬리”를 달고 수비선까지 들어갔다가는 “꼬리”가 해이해진 틈을 엿보아 총알처럼 후닥닥 공격선에 뛰쳐나오기도 했다. 이러기를 여러번 반복하다보니 나중에 동경춘을 지키던 “꼬리”는 저절로 피로해져서 동경춘을 지킨다는것이 그만 유명무실해지고말았다. 마침내 기회를 틈 탄 동경춘은 맨발의 위력

을 과시하며 그 제비같이 빠른 속도로 관중석의 눈뿌리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와-”


장내에 터지는 우뢰 같은 함성, 동경춘이 공만 잡으면 일어나는 함성이였다. 일단 공만 잡으면 상대의 문전까지 몰고 들어가 대방 수비와 문지기를 혼비백산케 하는 동경춘은 전반전 경기종료가 거의 다가올무렵, 연변팀 방어선에서 힘차게 내지른 공을 중간선에서 받아 잡아가지고 번개같이 돌따서면서 상대의 수비를 용하게 제치고 나는듯이 문전으로 돌입했다. 수비가 없는 1대1의 상황에서 황급한 마음에 두손을 펼치고 뛰쳐나오는 상대방 문지기, 이제 그 문지기와 막 충돌하려는 찰나 동경춘이 머리우로 슬쩍 공을 띄워올리더니 어디 한번 잡아보라는듯 공을 향해 끄떡 헤딩슛을 날렸다. 공은 문지기의 머리우를 날아 철렁 그물에 걸렸다.


“꼴이다!”

국내 최강의 실력을 자랑하던 천진팀이였지만 전반전 경기종료가 거의 다가올무렵 동북변강의 시골에서 온 연변팀에 덜컥 선제꼴을 내준것이다. 이윽고 후반전에 들어서자 천진팀은 실패를 만회하려는 일념으로 경기 시작부터 노도같이 공세를 발동하였다. 거기에 맞서 연변팀은 수비를 강화하는 한편 차츰 기회를 엿보면서 맞공격을 펼쳐나갔다. 


천진팀의 공세가 산야를 태우는 불길이라면 방어반격으로 완강하게 대항해나가는 연변팀의 기세 또한 북방의 서리처럼 차거웠다. 서로에게 자기 고향을 대표하고 자기 민족을 대표하는 자존심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경기는 마침내 백열화에 이르렀고 전반 경기의 최고조를 이루었다. 관중석의 눈길은 동경춘에게 쏠려있었다. 작달막한 키에 다부진 몸매, 날랜 속도, 민첩한 몸놀림… 맨발로 뛰는 괴물 같은 사나이는 말 그대로 천진팀 축구팬들에게 있어서 눈에 든 가시였으리라.


“저놈 잡아라! 8번.”

“저 맨발로 뛰는 놈, 걸어라, 걸어!”

별의별 소리가 다 들려왔으나 그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킨듯 동경춘을 비롯한 연변팀의 공격은 더욱 기승스레 천진팀의 문전을 괴롭혔다. 천진팀의 렬화 같은 공격 역시 창끝마냥 예리하게 날을 쳐들었지만 백열화에 이른 경기는 시종 서로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어느덧 시간이 흘러 경기 종료를 앞두게 되였다. 


관중석의 많은 축구팬들도 이제는 연변팀의 화려한 승리라고 점 찍고있을 때 아뿔싸, 뜻밖의 불상사가 일어났다. 연변팀의 수비 유성근이 그만 방어반칙으로 상대에게 프리킥을 내준것이였다. 연변팀 문전에서 정면으로 20여메터 구간에 연변팀 선수 다섯이 바자를 세운 앞에 천진팀의 3번 선수가 벌겋게 달아오른 눈으로 천천히 구멍수를 노려보며 마주 나왔다. 온 장내가 숨소리 하나 없이 긴장한 가운데 탕! 힘있게 내지른 공이 그대로 허공에 둥둥 떠서 호선을 그으며 연변팀의 꼴문에 휙 빨려들어갔던것이다. 어이쿠, 누가 어쩔 사이도 없이 부지불식간에 벌어진 일이였다. 눈섭에서 불이 붙는다더니…


훈련에 한창인 동경춘(좌)과 지청룡(우).


최종 연변팀과 천진팀간의 우승쟁탈 결승전은 1대1의 성적으로 나란히 4점을 기록했다. 동점일 경우에는 반칙차수를 세여 우승을 결정한다는 대회 규정에 따라 심판위원회의 검토가 시작되였다. 결과 천진팀의 반칙은 네번, 연변팀의 반칙은 다섯번! 맙소사, 반칙 하나가 더 많아 연변팀은 결국 우승의 월계관을 천진팀에 내주고말았다.


그번 운동대회가 결속된 이후 동경춘은 우수운동원대표로 주은래총리를 비롯해 등소평, 하룡 등 국가지도자들의 접견을 받게되였다.

“렬사유가족이라고 했던가? 과연 제비처럼 날파람이 있더군.

더욱 노력하여 앞으로 중국축구가 세계무대에 진출하는데 이바지하라구.”

감격의 날, 평생 잊을수 없는 날이였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 그해 11월초, 길림성축구팀의 선수 박완식이 동경춘을 찾아왔다. 화룡의 김석주, 훈춘의 채수은과 함께 동경춘도 길림성축구팀에 발탁되였으니 어서 동기훈련을 떠나야 한다고 했다. 그때의 희열을 더 말해 무엇하랴. 끝끝내 그처럼 갈망하던 프로선수가 되였는데야!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들이 길림성축구팀의 본부인 장춘 1) 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축구팀이 광주로 동기훈련을 떠난 뒤였다. 하는수없이 그길로 광주행 렬차에 몸을 실었는데 그만 앉은자리가 일반좌석이다보니 덜컹거리는 차체속에서 부대끼기란 실로 말이 아니였다. 하루이틀도 아닌 장장 5일간 잠 한번 제대로 못 자고 게다가 식사까지 거르다싶이 하며 광주에 도착하고보니 피로할대로 피로해진 몸이 물 먹은 모래자루 같았다. 그런대로 간신히 몸을 이끌고 중산대학 운동장에 이르니 마침 길림성축구팀과 8.1팀간의 교학경기가 한창이였다.


1) 길림성축구팀은 1961년에 장춘에서 연길로 본부를 옮겼다.


“경춘동무, 오느라고 수고했소. 소개는 차차 하는걸로 하고 인츰 운동장에 들어갈 준비부터 하시오.”

동경춘이 좀 풋면목이나 있는 연변선수들을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홀연 김사종 2) 지도가 수인사를 나누기 바쁘게 동경춘에게 명령하였다.


2) 초창기 길림성축구팀 전임 지도진의 한분. 1957년에 길림성축구팀의 사령탑을 잡았음.


세상에! 5일간이나 렬차에 부대끼며 지칠대로 지친 사람이 어떻게 휴식도 안하고 시합에 뛰여든단 말인가. 여느 사람 같으면 억이 막혀 입만 딱 벌리고말았겠지만 동경춘은 말없이 지도석에서 시키는대로 유니폼을 바꿔입었다. 이어 운동장에 들어서보니 아니나다를가 두다리가 자기 다리 같지 않게 좀처럼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런대로 뛴답시고 한참 뛰고나니 머리에 미열이 나며 온몸이 게나른해지는것이 그 자리에 그냥 주저앉고만 싶었다. 나중에는 눈동자마저 다 풀려서 눈앞에 뛰여다니는 사람 모두가 둘로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 몸을 간신히 이끌며 버텨나가는데 마침 눈앞에 날아오는 공이 보였다. 그런데 그 공도 둘로 보일줄이야. 어쩔 사이 없는 상황에서 에라, 모르겠다 하고 그만 앞의 “공”을 놓치고 뒤의 공을 냅다 찼는데 그만 기적같이 그 공이 허상이 아닌 진짜였고 그것이 상대편 대문에 그대로 날아들어가 그물을 흔들었다. 뒤이어 희한하게 그 꼴을 성사시킨 동경춘 역시 뒤로 벌렁 나자빠지며 그대로운동장에 드러눕고말았다. 말 그대로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력조차 없었던것이다. 


교학경기는 결국 그 기적 같은 동경춘의 꼴에 힘입어 길림성축구팀이 1대0으로 8.1팀을 이기는것으로 결속되였다. 그번 경기에서의 출중한 표현으로 동경춘은 길림성축구팀에 가입한지 얼마 안되여 주력선수진영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게 되였다.

(계속)


[신철국 장편스포츠실화] 챔피언 1965


차례(지난 기사는 클릭해 볼수 있습니다)

제1장 시련의 계단

봉변/기회의 신(神)/ 결심출국 류학스승의 마음 문제는 어디에?/ 축구의 고향 잊은것과 잃은것/ 어려운 세월에 제로의 답안 /맨발의 선수 첫발자국 희망을 향하여 


제2장 재기의 언덕

“백전로장” 원수(元帅)가 준 별호 최초의 전설들(1) 최초의 전설들(2) 

새로운 출발 “3종1대”개천의 룡들(1) 개천의 룡들(2) 이사도(二沙岛) 

희로애락 “몰인정”했던 리유 뒤로 밀린 리발 신입대원 정동권 

제3장 승자는 말한다

원자탄 불청객 분노의 벽 빅장대결 귀로의 기쁨 영광의 서장(1) 영광의 서장(2) 불멸의 승부(1) 불멸의 승부(2)




신철국

작가


연길명동문화예술원

부원장

【신철국 작가 프로필】

1971년 왕청현 하마탕향 전하촌(汪清县蛤蚂塘乡前河村)출생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 졸업


연변민족문학원(제1기/1994년), 로신문학원(제30기중청년고급연구토론반·아동문학/2016년) 수료.


‹중국조선족백년실록›집필위원회 위원(스포츠) 력임.


연변텔레비죤방송국 청소년부, '흑룡강신문','길림신문'에서 다편간 편집, 기자로 활약. 연변작가협회 회원.


1986년 아동소설 '신방주인'으로 등단.


'화신문학상','압록강문학상','흑토문학상','연변라지오문학상','상익컵 실화문학상' 등 수상경력 다수. 


단행본 장편스포츠실화 ‹챔피언 1965› 출간.


공저로 ‹60주년에 만난 60인›, ‹중국조선족백년실록›, ‹연변축구의 발자취를 찾아서› 등이 있음.


현재 명동문화예술원 부원장 겸 글짓기지도로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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