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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철국 장편스포츠실화] 챔피언 1965 (11) 최초의 전설들

조글로 潮歌网 2020-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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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일련재

 신철국  장편스포츠실화 

-1965년 길림성축구팀 전국축구 갑급팀련맹경기 우승 실록


연변인민출판사


최초의 전설들(1)


“허선생, 심심한데 옛말이나 좀 해줍소.”

박장수가 정종섭이 읽다가 내려놓은 장편소설 《등에》를 심심파적으로 뒤적거리다말고 허명룡에게 청을 들었다. 박장수의 곁에서 골똘히 장기묘수풀이책을 보고있던 홍종우가 그 말에 얼굴을 가린 책우로 기웃이 고개를 뽑고 저만치 맞은편에 앉은 허명룡을 힐끔거렸다.


“뭐 할게 있어야지…”

어느때부터인가 차창밖을 지그시 내다보고있던 허명룡이 습관적으로 입술을 감빨며 지나가는 말처럼 례사롭게 대꾸했다. 려로에 쌓인 피곤을 어떻게 풀지 몰라 갑갑해있던 길림성축구팀의 젊은이들이 그제야 살판났다는듯 여기저기서 “쿨룩쿨룩, 어흠어흠” 하며 부산하게 반응을 해왔다. 그것은 마치 준비가 다돼있으니 어서 이야기를 해달라는듯한 움직임들이였다. 하긴 허명룡이 아무런 대꾸가 없이 침묵했더라면 그건 가망 없는 일일지 모르지만 출전해 전국축구 갑급팀행렬에 진출했다.


그렇게 “뭐 할게 있어야지…” 하고 응대를 해올 때는 십중팔구 재미나는 이야기가 술술 이어져나오군 했으니 그럴만도 했다.


연변대학을 졸업하고 중학교 교원으로 배치받아서 열심히 학생들을 가르치던 허명룡이 천부적인 축구재간“탓”에 길림성축구팀에 “끌려온”것은 1955년말이였다. 교단을 떠나기 싫었지만 어길수 없는 상급의 명령이나 다름없는 전근령에 무조건 복종을 해야만 했다. 초창기 길림성축구팀에 중앙수비수로 입단해서 약 4년동안 눈부신 활약을 보였던 허명룡, 그무렵 길림성축구팀의 유일한 대학졸업생이였던 그는 전국축구무대에서도 “수재”로 주목받는 인테리축구선수였다. 대학을 나온 축구선수가 손가락으로 꼽을만큼 극히 희소했던 세월, 대학생출신의 선수를 보유하고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다른 팀의 부러움을 자아내기에 넉근했다.


그런 연유로 그가 일단 그라운드에서 상대방 선수와 충돌이라도 생기면 “우수선수보호원칙”이 발동돼서 심판의 처벌이 상대방 선수한테로 먼저 돌아가기 일쑤였다. 덤으로 인테리다운 뛰여난 분석력과 강한 조직능력도 갖추고있던 그는 1959년에 명예롭게 퇴역한 뒤를 이어 1960년부터는 길림성축구팀의 코치로서 리광수,박상복, 박만복 등 지도들을 보좌해오고있는중이였다.


“우리 길림성대가 언제 세워졌는지는 다들 알고있겠지?”

기계적으로 몇번 잔기침을 하고난 허명룡이 두눈을 빛내며 좌중을 빗질했다.

“덜커덕덜커덕!”

가락맞은 렬차의 동음소리가 단조롭게 들려오고있었다.


“그야 1955년이 아닙니까?”

지운봉이 대답했다. 다 알고있는 사실을 왜 새삼스레 묻느냐는듯한 표정이였다.

“8월 1일.”

곁에 앉은 허경수가 동을 달았다.

“그렇지. 헌데 그 시기 우리 길림성대를 책임진 지도가 누구였는지는 알고들 있나?”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있는 가운데 맞은편에 앉아있던 박장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마… 소화라고 들었는데…”

“그렇지, 맞아. 마소화! 바로 그분이였지.”

허명룡이 박장수쪽에 고개를 끄떡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동항(同行)이 다르긴 달라. 뭐가 달라도 다르단 말이야. 허허.하긴 그 역시 문지기출신이였으니까.”

“문지기였다고요?”

홍종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채 끄덕끄덕 졸고있던 정종섭이 언제 깨여났던지 두눈이 올롱해서 허명룡을 바라보고있었다.

“그렇다니까. 그리고 한족이였어.”

“한족이요?”

“그럼. 제1대 중국대표팀의 주력문지기였기도 했고.”


마소화(马绍华, 1925—2006년), 료녕성 대련이 고향인 그는 일제식민지치하에서 축구팀을 조직해 당당히 일본인축구팀을 물리친, 그무렵 흔치 않은 중국축구의 자존심이기도 했다.


1942년, 만철주식회사가 대련 성해공원에서 저들의 벗꽃축제행사를 크게 벌였는데 그 경축행사의 하나로 중일축구시합도 벌어졌다. 바로 마소화가 림시로 무은 중국인축구팀과 일본인들로 조직된 만철축구팀간의 경기였다. 사실 이 시합은 일본인들이 중국인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려고 의도적으로 조직한 경기였다. 중국인축구팀도 마소화가 출근하고있던 만철주식회사의 책임자가

특별히 그를 찾아 강압적으로 꾸리게 한 팀이였다. 하다보니 시합전부터 일본인책임자는 마소화한테 절대 이겨서는 안된다고 내놓고 압력을 넣었다. 하지만 민족의 자존심이 강했던 마소화는 그런말쯤은 마이동풍으로 여기고 팀을 이끌어 만철축구팀을 2대1로 후딱 꺾어버렸다. 그 바람에 그는 시합이 끝나자마자 회사에서 쫓겨나고 한동안 일본경찰들에게 쫓기는 곡경을 치렀다.


1947년에 대련건국학원(大连建国学院)을 졸업한 그는 선후로 “대련화청”, “애화” 등 축구팀에서 활약하다가 해방을 맞이했다.


1951년 12월, 제1회 전국축구시합에 참가한 동북팀의 문지기 마소화와 부분적 조선족선수들(좌로부터 마소화, 김병규, 최증석, 리봉춘, 김룡호). 이 대회에서 우승을 따낸후 이들은 제1대 중국대표팀선수로 되였다.


1951년, 김룡호, 김병규, 리봉춘, 최증석, 최태환 등 조선족선수들과 함께 동북을 대표하여 천진에서 펼쳐진 제1회 전국축구시합에 나갔던 그는 동북팀이 불패의 성적으로 우승을 따내는데 기여했다. 그는 시합에서 꼴 한개도 먹지 않는 진기록을 일궈내기도 했다. 그번 경기가 끝난후 마소화는 동북팀의 전체 주력선수들과 함께 전국축구선수로 뽑히면서 주력문지기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는데 그 팀이 바로 신중국의 첫 국가팀이였다. 


이듬해 마소화는 중국을 대표해 핀란드 수도 헬싱키에서 진행된 제15회 올림픽에 참석하여 대표단과 함께 주은래총리가 맡겨준 “중국의 국기를 올림픽상공에 휘날리는” 임무를 완성했다. 귀국도중에 그들은 선후로 쏘련, 뽈스까를 방문하며 친선경기를 치렀는데 출중한 표현으로 외국벗들의 절찬을 받았다. 특히 쏘련에서는 문지기 야신을 만나 우정을 쌓기도 했다. 당시에는 별로 이름이 없는 한낱 평범한 문지기에 불과했던 레프 이완노비치 야신(Lev Ivanovic Yashin), 후날 그가 세계축구계 문지기의 전설로, 내노라 하는 축구계의 문지기들이 하나같이 추앙하는 문지기의 신(神)으로 될줄을 마소화도 미처 몰랐었다.


“근데 마소화선생하고 야신이 무슨 관계가 있기에?…”

중앙방어수로 뛰고있던 홍종우가 곁가지를 치고있는 이야기에 태클을 걸었다. 그라운드에서의 위치가 늘 조마조마하게 마음을 조이는 중앙방어수여서인지 그는 지루한 이야기는 딱 질색이였다.


“허 참, 사람두, 우물에 가서 숭늉 찾겠네.”

곁에 서있던 정지승이 씨익 웃었다. 먼 려로에 그냥 앉아있기가 불편했던 모양으로 아까부터 좌석에서 일어나 허리를 움직거리던 그였다.

“허허…”


느닷없는 홍종우의 물음에 사람 좋게 껄껄 웃고난 허명룡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뒤를 이었다.


“잠착히 듣다보면 그게 다 알조가 있다니까.”


1951년, 쏘련 모스크바 디나모팀의 문지기로 축구인생을 시작한 야신은 1971년에 은퇴할 때까지 장장 20년 동안 150회 이상의 페널티킥을 막아냈고 국가대표로 활약하면서 치른 78차례의 경기에서 꼴을 단 70개만 허용하는 0점대(경기당 0.90꼴) 실점률을 기록하며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쏘련이 1956년 오스트랄리아 멜버른올림픽에서 우승하고 1960년 유럽선수권대회를 석권했던것도 바로 그의 놀라운, 가히 기적에 가까운 눈부신 활약 덕분이였다.


한쪽 다리를 살짝 구부린 독특한 자세로 슈팅을 잡아내는 그의 곡예사 같은 묘기에 매료된 세계의 축구팬들이 야신에게 “흑거미”라는 별명을 달아준것도 그무렵의 일이였다. 1.89메터의 장신을 가진 야신이 선수시절에 검은 옷에 검은 장갑을 끼고 공을 막아냈다고 해서 선물받은 별호이기도 했다. 후세에 꼴을 잘 막아내는 문지기를 일컬어 “거미손”이라고 한것도 거기에서 비롯된것이였다. 1963년에는 력대 문지기사상 최초로 유럽최우수선수상(현재까지 문지기로는 유일함)을 거머쥐기도 했던 그는 1990년 3월 20일에 암으로 빛나는 일생을 마감했다. 국제축구협회에서는 그의 업적을 기려 1994년 제15회 월드컵부터 본선 최우수문지기에게 “야신상”을 수여하고있다. 월드컵에서 개인이름으로 명명된 상으로는 유일하다.


“야신을 만나고 돌아온 마선생은 동북체육학원축구팀 1) 을 조직했어. 그러다 1955년 8월부터는 약 1년 동안 길림성대의 초대지도로 있다가 산동대의 지도로 자리를 옮겼어. 그의 꿈이라면 언젠가는 꼭 야신이 지킨 철벽꼴문을 깨뜨리는 중국선수가 나오는 거였지. 그런데 그 꿈이 너무나도 일찍 이뤄질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1958년, 마소화는 중국에서 야신을 다시 만나게 됐는데 운이 좋게도 그가 지킨 쏘련팀의 꼴문을 깨뜨린 선수가 나온거야. 그것도 우리 조선족선수가!”

“네에?”

“저런!”

“우리 조선족이라니요?”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졌다.

“그, 그게 누, 누굽니까?”


1) 오늘날 료녕축구팀의 전신임.


최초의 전설들(2)


1958년 2월, 제16회 올림픽 축구우승을 따낸 쏘련대표팀이 중국을 방문하였다. 중국측에서는 외국팀과의 경기에서 늘 자기의 실력을 잘 발휘하는 길림성축구팀을 내세워 쏘련대표팀과 첫 껨을 장식하도록 배치했다. 광주 월수산경기장에서 벌어진 그번 경기는 거의 조선족으로 무어진 길림성축구팀이 성립이래 세계 1등팀과 처음으로 치르는 겨룸이기도 했다.


“그래 결과는 어떻게 됐습니까?”

정종섭이 또 참지 못하겠다는듯 말줄을 바싹 당겼다. 모두들 잠자코 허명룡의 입을 주시했다. 누군가 꼴깍 마른침을 넘기는 소리도 들렸다.

“패했어, 0대4로. 전반, 후반에 각각 꼴 두개씩. 쩝.”

허명룡이 적이 쑥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다셨다. 지도에 박상복, 선수에 리광수, 김영기, 허명룡, 방정훈, 박광순, 최철봉, 송지학, 지운봉, 손중천, 동경춘, 채수운, 동량일(한족), 리민, 최룡철,지청룡, 문정오, 김석주 등으로 무어진 길림성축구팀은 그무렵 국내 강팀중에서도 4강 안에 드는, 제법 일가를 이룬 강팀중의 강팀이였지만 처참하게 무너지고말았다. 한마디로 세계강팀의 벽은 높았다. 실력도 실력이였지만 정신력도 대단했다. 세계우승을 비롯한 국제강팀들과의 대결은 그만큼 년륜이 필요했다.


“그런데 말이지. 쏘련대가 우리하고 이긴 뒤 북경대하고 붙었는데 1대1로 무승부를 낸거야. 말이 북경대지 실은 국가대나 다름없었다구. 그때 북경대엔 웽그리아류학파가 주축을 이루고있었거든. 지금 우리 대에 있는 박만복지도두 그때 북경대에 있었어. 그이도 경기장에는 왔던데 발목을 다쳐가지고 정식경기엔 나서지 않더군. 헌데 북경대가 그번 경기서 쏘련팀과 무승부를 낸데는 다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지. 쏘련대의 야신을 비롯한 4명의 주력선수가 근본 나서지 않았던거야. 대신 이튿날에 있었던 8.1대와의 경기는 판판 달랐어…”


2월 22일, 그무렵 중국의 일류 축구팀으로 분류되고있던 8.1팀이 자존심대결에 나섰다. 중국인민해방군에 소속돼있던 8.1팀은 말 그대로 군인정신으로 똘똘 무장된 강철의 대오였다. 중국속담에 “오는자는 상대하기 쉽지 않고 상대하기 쉬운자는 오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그것을 진작 알고있기라도 한듯 쏘련팀 역시 대북경팀전과는 달리 야신을 비롯한 전부의 주력들을 선발로 내보냈다. 헌데 누가 알았으랴. 생각밖에도 쏘련팀이 전반전에 선제꼴을 먹고 0대1로 끌려가게 될줄을!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하던 경기가 전반전 39분경을 넘어설 즈음이였다. 8.1팀의 좌익공격수로 활약하던 조선족선수 최형섭(1933—1989년)이 상대방 금지구역 내곽지대에서 중앙공격수로 나선 동료 세적웅(洗迪雄)의 크로스(축구에서 공을 가로방향으로 차는 일)를 넘겨받아 통렬하게 때린 공이 야신이 지키고 선 쏘련팀의 꼴문을 작렬시켰던것이다.


“와—”

일시에 장내가 떠나갈듯 함성이 끓어번졌다. 뜻하지 않게 선제꼴을 허락한 쏘련팀이 대반격에 나섰다. 결국 후반전 37분경 쏘련팀은 코너킥기회를 리용해 동점꼴을 따냈다. 경기는 최종 1대1로 무승부를 기록하며 막을 내렸다.


그해 쏘련팀은 중국팀들과의 친선방문경기에서 도합 10전 8승 2무라는 무패의 성적을 안고 귀국했지만 세계적인 천재문지기 야신에게는 “치욕”이였다. 축구의 변방 중국에 왔다가 일개 조선족선수 최형섭한테 꼴을 허락했으니 자존심이 크게 상했던것이다. 한편 조선족선수 최형섭의 그번 세계급수준의 슛을 《해방군보》, 《북경석간》, 《양성석간》 등 전국의 여러 신문들과 간행물들이 앞다투어 대서특필을 했다. 그런데 유감스러운것은 많은 축구팬들이 그가 조선족이였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점이였다.


1957년부터 국제경기에서 박만복과 함께 수차 국가팀의 동료로 호흡을 맞췄던 최형섭은 고향이 길림성 훈춘시 량수진이다.1950년에 참군했던 그는 이듬해 심양군구운동회에서 8.1축구팀 지도진의 눈에 들어 선수생애를 시작했었다.


1958년, 8.1팀을 대표해 중일친선시합을 치른 뒤 당시 국무원 주은래총리, 국가체육운동위원회 주임 하룡원수를 모시고 단체기념사진을 남기고있는 최형섭(점선안의 사람, 작은 사진 참고).


길림성축구팀의 제1대 지도였던 마소화는 1979년에 고향 대련으로 귀향한후 주로 청소년축구훈련사업에 진력했다. 전 중국대표팀의 손계해(孙继海)와 같은 우수한 축구선수들을 양성해낸 그는 2006년 5월 1일에 대련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1세였다.


“야신이 지킨 꼴문을 뚫었다니! 거참 대단한데.”

잠시 이야기가 끊어진 틈을 타 박장수가 끼여들었다. 언젠가 단체로 영화구경을 갔다가 “신문간보(新闻简报)”에서 야신의 활약상을 접했던 그였다. TV가 아직 보급되지 않았던 당시 영화관들에서는 영화 본편을 상영하기전에 국내외뉴스를 묶은 기록영화들을 돌리군 했는데 그것을 일러 “신문간보”라고 불렀다.


“허허, 내 이야기가 그래도 들을만했던 모양이지?”

좌석밑에 놓여있던 큼직한 비닐물통을 꺼내 탁상에 놓여있는 컵에다 받아 목을 추기던 허명룡이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좌중을 둘러봤다. 그 말에 여직 도정신해 귀를 기울이고있던 젊은축들이 머쓱한 표정이 되여가지고 히죽거렸다.


“그럼 이번엔 또 시합을 하다가 축구공이 터진 이야기나 해줄가?”

“공이 터지다니요?”

애숭이 정종섭이 그게 또 무슨 소리냐는듯 두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우리 대에서 생긴 일인데…”

그렇게 말머리를 뗀 허명룡의 눈길이 저도 몰래 저쪽 차창가에 비스듬히 앉아있는 리광수한테로 날아갔다. 반도체라지오에 귀를 붙이고 앉아있는 리광수는 진짜 졸음이 와서인지 지그시 두눈을 감고있었다.


“제1회 전국운동대회때였어. 그때 우리 대도 결승전에 참가했었는데…”

중화인민공화국 제1회 운동회 축구경기는 1959년 5월 27일부터 6월 14일까지 남녕, 천진, 태원, 정주 등 네개 경기구에서 예선경기를 치르고 각 경기구에서 3등 안에 든 팀들이 9월 1일부터 27일까지 북경과 천진에서 각각 결승경기를 진행했었다. 특히 그해에는 전국 갑급팀과 을급팀 경기를 따로 진행하지 않았으므로 제1회 전국운동회 결승단계경기에 출전한 열두개 팀을 본 년도의

갑급팀으로 인정하여 이듬해 리그에 참가하게끔 했었다.


길림성축구팀은 예선에서 태원경기구의 1등으로 출전하였으나 결승단계경기를 거쳐 나중에는 8등자리에 주저앉았다. 원인이라면 원 국가팀의 선수들이 모두 8.1팀, 북경팀, 하북팀(원래의 천진팀) 등 팀에 편입되여 출전했으므로 이 세개 팀의 실력이 한층 강화되였기때문이였다.


“그때 우리 대는 북경 선농단경기장에서 시합을 치렀는데 하북성대와 경기를 치르던 날에 세상을 깜짝 놀래우는 희한한 일이 일어났어…”

흘러간 추억을 더듬는 허명룡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고이기 시작했다.


그번 전국운동대회 축구경기에는 현역 국가팀 주력선수들이 각 성을 대표해 참가했다. 그때 하북성팀에도 국가팀에서 활약하던 선수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중의 대표적인 선수가 엄덕준 1) 이였다. 하북성팀의 중앙방어수를 담당하고있던 엄덕준은 길림성축구팀과의 대결을 앞두고 지도진으로부터 “중형땅크”로 전국에 소문이 자자한 길림성축구팀의 리광수를 중점방어하라는 특명을 받았다. 시합이 개시되자 엄덕준은 이 특명을 받들고 “중형땅크” 리광수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는데 그야말로 찰떡수비가 따로 없었다.


1) 엄덕준(严德俊, 1935-현대), 한족, 축구운동건장. 중경시 자양현사람.


그러던 가운데 전반전 경기가 중반을 막 넘어갈무렵이였다. 어쩌다 두 선수가 한데 엉켜붙어 공을 쟁탈하게 되였다. 워낙 장사 같은 몸집을 가진 선수들이라 그들의 접전은 말 그대로 룡쟁호투(龙争虎斗)를 방불케 했는데 둘 다 어떻게 힘을 썼던지 그만 새 축구공이 “쾅!” 하고 터져버리고말았다. 순간, 본인들은 물론 경기장의 선수와 심판이 아연실색했고 뒤미처 물뿌린듯 조용해있던 관중석이 세상 처음 구경하는 희한한 광경에 “와—” 하고 뿜어내는 찬탄으로 들끓었다. 그 광경을 이튿날 《체육보》는 “‘중형땅크’와 ‘검둥이 셋째’의 대전”이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했다. 전국의 축구팬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검둥이 셋째”란 엄덕준의 별명이였다. 그의 얼굴이 철색이고 등번호가 3번이여서 붙여진 별명이였다.


“히야—”

좌중의 시선이 일제히 리광수한테로 날아갔다. 탁상에 머리를 대고 반도체라지오에 귀를 가져간 리광수는 지그시 두눈을 감은채 잠자코 있었다. 코 고는 소리가 가늘게 들렸다. 아마 쪽잠에 든 모양이였다.


1956년 제16회 올림픽 출전준비로 국가팀에 선발되여 한 시기 있다가 다시 길림성축구팀에 돌아와 10여년간 줄곧 중앙공격수로 활약한 기간에 팀은 리광수를 중견으로 한 독특한 전술풍격을 형성해 국내 축구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확보했다.


키가 크고 몸집이 웅장한 리광수는 중앙공격수로 늘 상대편의 방어진에 뛰여들어 수비진을 크게 휘저었다. 그때면 눈치가 빠르고 폭발력이 뛰여난 손중천이거나 속도가 빠르고 “대포알슛”으로 이름있는 지청룡이 인차 량편에 붙어 리광수가 교묘하게 찔러주는 공을 득점으로 련결하군 했다.


1958년, 전국축구 갑급팀련맹경기에서 길림성축구팀은 4등의 영예를 따냈다. 그해 팀은 국가를 대표해 쏘련에 가서 친선경기를 치르게 되였다. 우즈베끼스딴가맹공화국 수도 따슈껜뜨 운동장에서 경기를 하게 되였는데 마침 중앙아시아에 계시는 리광수의 친척할아버지가 일가친척들을 거느리고 200여리 길을 달려왔다. 그는 “훌륭한 후손을 두어 대단히 기쁘다”면서 리광수한테 선물로 시계 6개에 사진기, 라지오를 선물했다.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는 수만명의 백의동포들이 눈물을 흘리며 조선족 위주로 구성된 길림성축구팀을 응원했다. 그번 방문시합에서 길림성축구팀은 7전 4승 2무 1패의 우수한 성적을 기록했다. 그때 리광수는 유일한 우수선수로 뽑혀 표창을 받았는데 쏘련신문들에 그의 사진과 함께 사적이 실리기도 했다.


1960년, 길림성체육계를 대표해 영광스럽게도 전국문화교육계통 군영회에 참가했던 리광수는 같은 해에 길림성축구팀을 따라 조선방문경기에 나서면서 또 한번 조선축구계를 들썽해놓았다. 당시 길림성축구팀은 조선에서 강팀으로 알려져있던 조선 교통성팀을 5대1로 대승했는데 그번 경기에서 리광수가 꼴 4개를 넣었던것이다.


리광수는 그 시기를 전후하여 길림성축구팀의 주장, 조리지도, 지도, 체육훈련반 부주임 등 직을 맡으며 자신의 재능을 남김없이 과시했다. 잔디밭에서 용맹을 떨치던 그가 체육행정사업에로의 이행을 준비하면서 남다른 공헌을 예고하고있을 때 전례 없는 “문화대혁명”이 일어났다. 그가 그토록 애착을 품고 일심전력으로 키워왔던 길림성축구팀은 해산되였고 본인은 외국에 친척이 있다는 리유로 “외국특무”라는 어이없는 죄명까지 들쓴채 농촌으로 “로동개조”를 내려가야만 했다.


정열적으로 축구꿈나무들을 육성하던 리광수(좌 1)옹.


“파쑈지도”, “외국특무”로 투쟁받으며 훈춘현 영안의 어느 한 시골에 쫓겨갔던 그는 1972년, 훈춘시체육운동위원회 주임으로 잠시 사업하다가 1973년, 길림성축구팀의 총지도를 거쳐 1975년,연변대학에 몸을 담게 되였다. 평생 축구에 몸 바치는게 그토록 소원이였는데 이런저런 원인으로 그 소원을 이룰수 없게 되자 결국 실망을 품은채 연변대학으로 발길을 향한것이다. 그러나 그는 연변대학에 오자마자 그런 불쾌한 일들은 뒤로 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열심했다. 당시 비록 대학학력을 갖고있지 못한 그였건만 다년간의 탐구와 실천경험이 있었기에 대학교 교수과제를 넘쳐 수행할수 있었다. 


리광수는 1992년에 정년퇴직할 때까지 연변대학 체육학부 부주임, 주임 직을 력임하면서 허준호, 방인권, 리호은, 주청렬, 김민영, 최영숙, 김복순, 박경희 등 1,000여명에 달하는 체육인재들을 양성해냈다. 퇴직후에는 또 길림성축구협회 위원, 연변축구협회 부주석, 동북조선족축구친목회 부회장, 원 길림오동팀 고문, 연변로인축구협회 회장, 고문으로 활약하면서 조선족축구사업을 위해 일체를 헌신했다. 그런데 하늘의 풍운조화는 예측할수가 없었다. 로년에도 그토록 건장한 체력을 자랑하며 어린 축구꿈나무들을 육성하던 그는 2002년 6월, 불행히도 뇌출혈로 타계했다.


“덜컥, 덜커덕…”

렬차가 차츰 속도를 줄이고있었다. 또 어느 역에 들어서는것 같았다.

(계속)


[신철국 장편스포츠실화] 챔피언 1965


차례(지난 기사는 클릭해 볼수 있습니다)

제1장 시련의 계단

봉변/기회의 신(神)결심출국 류학스승의 마음 문제는 어디에?축구의 고향 잊은것과 잃은것/ 어려운 세월에 제로의 답안 /맨발의 선수 첫발자국 /희망을 향하여 


제2장 재기의 언덕

“백전로장” 원수(元帅)가 준 별호 /최초의 전설들(1) 최초의 전설들(2) 

새로운 출발 “3종1대”개천의 룡들(1) 개천의 룡들(2) 이사도(二沙岛) 

희로애락 “몰인정”했던 리유 뒤로 밀린 리발 신입대원 정동권 

제3장 승자는 말한다

원자탄 불청객 분노의 벽 빅장대결 귀로의 기쁨 영광의 서장(1) 영광의 서장(2) 불멸의 승부(1) 불멸의 승부(2)




신철국

작가


연길명동문화예술원

부원장

【신철국 작가 프로필】

1971년 왕청현 하마탕향 전하촌(汪清县蛤蚂塘乡前河村)출생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 졸업


연변민족문학원(제1기/1994년), 로신문학원(제30기중청년고급연구토론반·아동문학/2016년) 수료.


‹중국조선족백년실록›집필위원회 위원(스포츠) 력임.


연변텔레비죤방송국 청소년부, '흑룡강신문','길림신문'에서 다편간 편집, 기자로 활약. 연변작가협회 회원.


1986년 아동소설 '신방주인'으로 등단.


'화신문학상','압록강문학상','흑토문학상','연변라지오문학상','상익컵 실화문학상' 등 수상경력 다수. 


단행본 장편스포츠실화 ‹챔피언 1965› 출간.


공저로 ‹60주년에 만난 60인›, ‹중국조선족백년실록›, ‹연변축구의 발자취를 찾아서› 등이 있음.


현재 명동문화예술원 부원장 겸 글짓기지도로 근무.


 안내 : "문학작품"은 sinbalam과 위챗친구하여 보내주시면 등재해드립니다.-신바람

최신 작가와 작품
2020년 최신 작품
(수필) 남의 일을 하며 산 인생 (궁금이)
[문학닷컴] 김창영 시 "순서를 꼽는다면"(외 2수)(중편) 향에는 점심때가 없다 (허강일)[구술59] 이름난 중국조선족 음악활동가 (박장수 편 1)
[챔피언 1965 (10)] “백전로장”/원수(元帅)가 준 별호
[문학닷컴] (칼럼) 한 농예인의 동상 그리고...(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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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작가
칼럼||김혁채영춘리성일우상렬허명철박광성강효삼리성일장동일박광해최학송박승권김혁현춘산채영춘주소란|박광성|예동근|김범송김경애김문일김광림리동렬김정룡문학궁금이김창영허강일궁금이회령김정권최상운김훈지향옥림운호김병민손룡호궁금이렴광호리해란서가인신철국최화길손룡호허강일이문혁김학철김혁림원춘허미란박장길렴광호김재현김수영김두필김일량남영전현춘산서가인리문호리광인김혁한석윤|허미란김학송김호웅남룡해김정권김영분림운호장학규리련화한영철김경진김영택김병민김복순최상운회령채영춘김명숙류영자김춘실류재순려순희김홍남윤청남리동춘심명주최화김명순[허강일 추리소설] 도시는 알고있다18[허강일 추리소설] 흉수는 바로 그놈이였다력사[구술] 김학철(7)[珍藏版]리광인 '70년대 사람들'|[구술] 남영전(1) (2) (3) (4) (5) (6) 양림(구술)채영춘(10) 리광인 실화문학《아,나의 중학시절이여》(구술)림원춘(7) |특집[珍藏版] 우리말 어원 산책(렴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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