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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철국 장편스포츠실화] 챔피언 1965 (14) 이사도(二沙岛)/희로애락

조글로 潮歌网 2020-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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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일련재

 신철국  장편스포츠실화 

-1965년 길림성축구팀 전국축구 갑급팀련맹경기 우승 실록


연변인민출판사


이사도(二沙岛)


광동성의 성소재지이자 정치, 경제, 교육, 문화의 중심지인 광주! 남월(南越), 남한(南汉), 남명(南明)의 고도(古都)요, 중국 근대,현대 혁명의 발원지인 광주가 국내 체육인들로부터 주목을 받기시작한것은 이사도(二沙岛)때문이였다.

대나무와 자형나무 그리고 목면화, 비파나무들에 울긋불긋 둘러싸인 신비의 섬 “주강제일도(珠江第一岛)”! 민간에서는 속칭 이사두(二沙头)라고도 불리는 이 명소에 현대적인 대형체육훈련기지가 들어섰다.


주변에 아늑한 숲을 끼고 조화롭게 자리 잡은 4개의 체육훈련장, 푸르른 잔디밭…

“야, 받아라!”

“슛―”

“어이쿠.”

“빨리 뛰엿! 빨리!”

“헉, 헉…”

해방후 신중국이 탄생하면서부터 새로 거듭난 광주 이사도체육훈련기지(二沙岛体育训练基地, 현 광동체육운동기술학원)는 이왕의 한적했던 분위기와는 달리 혈기왕성한 청장년들로 북적거렸다.


길림성축구팀과 더불어 국내 갑급팀에서 활약하고있는 여러 축구팀들이 이곳으로 동계전지훈련을 나온것이다.

지리적으로 열대와 아열대 지구에 속하는 광동성, 1월달의 평균 기온은 섭씨 8~21℃이고 년평균 기온은 섭씨 19℃ 이상, 그만큼 무더위와 소낙비가 그칠 새 없는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훈련하러 오는 선수들치고 혀를 내두르지 않는 선수가 없을 지경이였다.


첫째 리유라면 그토록 훌륭한 훈련시설과 아름다운 풍광때문이였고 둘째 리유라면 그 지독한 날씨에서의 혹독한 훈련때문이였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초기에 최초로 세워진 전국 최대의 운동원양성훈련기지였던 이사도체육훈련기지, 중국체육계의 산파역할을 톡톡히 해왔던 이 훈련기지는 중국체육사에 결코 마멸할수 없는 당당한 한페지를 차지하고있었다.


알다싶이 건국시초에 중국에는 전문 운동원훈련을 대비한 체계적인 체육활동 장소와 시설이 거의 공백이나 다름없었다. 혹간 일부 대학교거나 중등전문학교에 형식적인 체육활동장소가 있긴했지만 전문적인 체육운동훈련장소로는 근본 사용할수가 없었다.


따라서 1952년, 핀란드 헬싱키에서 펼쳐진 제15회 올림픽 준비에 나섰던 전국선수팀(국가체육대표팀)은 훈련장소가 없어 애를 먹었다. 그러던차에 마침 국내에서는 그나마 괜찮은 곳으로 알려져있던 원 천진외국인조계지의 외국인체육구락부(중경도 100번지에 위치)에서 합숙훈련을 실시했었다. 원체 기초가 박약한데다 설비마저 락후하고 거기에 또 정치적인 원인으로 피해 1) 를 입다보니결국 올림픽촌에 국기만 게양한채 빈손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번 올림픽은 “국제 인류의 평화와 친선을 도모하고 승리보다 참가하여 최선을 다하는 페어플레이정신을 강조하며 인종, 종교, 정치적 리념에 차별받지 아니하고 참가선수는 국가를 대표하지만 경기는 개인간의 경기이다.”고 명시한 올림픽정신이 색 바랜대회이기도 했다.


규칙을 존중하며 정정당당하게 승부하는 스포츠정신은 뒤로하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대변하는 미, 쏘 두 진영의 세력각축장으로 혼잡했던 헬싱키올림픽, 그래서 그번 대회를 거울로 중국은 4년 뒤인 1956년에 오스트랄리아 멜버른에서 펼쳐질 제16회올림픽 준비에 부심하고있던중이였다.


1) 이해 중국은 대만의 반대로 출전이 무산되여 비공식적으로만 시합에 참가했고 대만은 불참했다. 또한 독일은 동, 서 독일이 단일팀을 구성하는 조건으로 국제올림픽위원회에 가입했으나 동독이 단일팀 구성에 성의를 보이지 않아 서독만 단독으로 참가하는 등 “두개 중국”, “두개 독일” 시비로 국제정치의 소용돌이에 빠졌었다.


국무원 총리 주은래와 부총리 겸 국가체육운동위원회 주임이였던 하룡원수를 비롯한 해당 책임자들은 오랜 시일간의 조사연구와 토론을 거쳐 국가 주도하의 합숙훈련방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 방안대로 실천하려면 우선 현대화적인 체육훈련기지가 있어야 했다. 특히 기후와 날씨, 계절 등의 영향을 받지 않고 전천후로 훈련을 담보할수 있는 지역을 찾아야만 했다. 최종 광주가 물망에 올랐다.


1954년 10월, 하룡원수가 광주로 갔다. 주은래총리의 지시에 따라 훈련장 부지 선정에 나선것이다. 광주시 시장 주광(朱光)이 하룡을 배동했다. 하룡은 주광이 후보지로 추천한 주강 하반의 이사도를 중점고찰하던중 그곳에 있던 이양원(颐养园)을 선택하여 그곳에 새 중국의 첫 체육훈련기지를 세우기로 결정했다. 부지면적이 2만평방메터에 달했던 이양원은 북경의 이화원(颐和园)을 모방한 건물로서 중화민국시기 광동성의 민족상공업가이며 광주의 유명한 의학교육가이자 화남지역의 이름난 약제조상인 량배기1) 선생이 환자 치료를 목적으로 일떠세운 현대화적인 건물이였다.


1) 량배기(梁培基, 1875—1947년), 광동 순덕(广东 顺德) 사람.


그해 국가체육운동위원회에서는 200만원이라는, 당시로서는 가히 천문수자라고 할수 있는 전문자금을 내려보내여 이사도에 체육훈련기지를 시공하도록 했다. 이는 그무렵 광주에서도 가장 큰 공사중의 하나였다. 경기장과 체육관 설계는 당시 세계적으로 체육훈련시설이 가장 선진적인 웽그리아를 모방했는데 바로 그들이 다뉴브강 호반에 일떠세운 부다뻬슈뜨체육섬(岛)이 모델이였다. 원 이양원은 선수들의 기숙사구역으로 개조했고 또 새로 15만평방메터의 부지를 확보해 운동장과 경기장을 신설했다.


경기장과 체육관은 축구, 롱구, 배구 등 대형구기운동은 물론 륙상, 수영, 다이빙, 탁구, 바드민톤, 테니스, 야구, 체조, 력기, 사이클 등 20여개의 종목들을 날씨의 제한을 받지 않고 동시에 진행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이 체육훈련기지는 당시로 말하면 국내 최초였을뿐만아니라 해외에서도 그 류례를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특히 건축설비를 비롯해 기술자와 로동자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나라를 대표해 올림픽에 나서는 선수들한테 하루빨리 훈련장소를 제공해주기 위해 시공일군들은 밤낮없이 돌아쳤다.


원 이양원뒤에는 커다란 저수지와 늪이 있었는데 그것을 메우려면 대량의 모래와 흙이 필요했다. 이사도에는 근본 바깥지역과 통하는 륙로가 없었다. 그래서 광주시내에 있는 목선들을 총동원하여 흙을 퍼날랐는데 이들이 밤중에 오가며 내건 등불이 멀리서 보면 마치 별무리를 방불케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지 건설에서 한가지 시설만은 완성하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다는 후문이 있는데 그게 바로 운동원들의 피로회복에 없어서는 안될 사우나시설이였다. 왜냐하면 당시로는 누구도 사우나를 해본적이 없었고 거기에 관련된 자료를 구할수가 없었기때문이였다.


1년 8개월의 시공을 거쳐 1956년 4월에 드디여 이사도체육훈련기지가 완공됐다.


훈련기지 기숙사내에 마련된 시설들은 당시로서는 국내 선수들이 구경도 못한 신기한것들이였다. 침대는 최고급스프링침대였고 침대마다에는 침대보, 담요가 단독으로 비치되여있었다. 기숙사내에는 또 호실마다 단독화장실이 있었다.외빈들에게만 스프링침대가 제공될 때였으니 그야말로 최고급시설이 아닐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최고급시설도 정작 선수들한테 있어서는 격조 높은 휴식의 방편에 불과했다. 오히려 그런 최적의 훈련장소가 마련된탓에 그리고 그러한 선진적인 훈련기지를 사용하고있다는 “특수함”때문에 더욱더 훈련에 땀동이를 쏟아야만 했던것이다. 길림성축구팀의 선수들도 례외가 아니였다.


신임지도 박만복의 지도아래 대운동량훈련을 매일이다싶이 실시하고있는 길림성축구팀 선수들한테 있어서 이사도기지에서의 하루하루는 고된 훈련의 련속이였다.


운동강도의 밀도를 훨씬 초과하는 대운동량훈련을 하루 평균 4~5시간씩 하노라면 그저 심신의 뼈가 물러앉는것만 같았다. 특히 박만복이 예전에는 근본 찾아볼수 없었던 대강도, 대밀도 훈련을 부르짖을라 치면 정말이지 선수들은 한바탕 고역을 치러야만했다.


훈련하고있는 길림성축구팀 선수들.


“100메터를 12초에 뛰엿! 휴식시간은 5초다.”

“100메터를 11초 9에 뛰엿! 휴식시간은 4초다.”

“100메터를 11초 8에 뛰엿! 휴식시간은 3초다.”

“100메터를…”


정말이지 그 훈련이란 지금의 선수들로서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수 없이 가혹한것이였다. 이른바 한 선수의 반복달리기운동에서의 휴식시간을 점차적으로 축소하여 운동의 밀도량을 높이고 지정된 시간내에 확정된 거리를 반복적으로 달리게 하여 그 운동의 강도량을 보증한다는 일명 대밀도, 대강도 훈련! 그밖에 드리블, 슛, 기술과 전술 등 기술응용과 함께 순발력, 내구력을 요하는 일련의 훈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련달아 나섰다.


허지만 누구 하나 원망하는 선수는 없었다. 어쩌다 후회가 들긴 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그처럼 힘에 부치고 지겨운 훈련이였건만 모두들 달갑게 그리고 참답게 감내하고있었던것이니 이것이 그래 정녕 그들의 소원이였던가? 아니면 바람이였던가? 영광으로 점철된 길림성축구팀의 찬란한 력사에 본의 아니게 먹칠을 했다는 그 하나의 죄책감으로 푸르른 잔디밭에 코피를 쏟아가고 찌는듯한 뙤약볕에 구슬땀을 흘려가며 헐금씨금 육신을 혹사하는 그들이였다…


“와신상담(卧薪尝胆)”! 거북한 섶에 누워 쓴 쓸개를 맛 보며 래일의 성공을 위해 오늘의 괴로움과 어려움을 참고 견디여나간다는 사자성구.

하다면 우리 길림성축구팀 선수들이 그러한 “와신상담”으로 영위해나갔던 이사도에서의 훈련생활은 구경 어떠했으며 그들이 엮었던 희로애락은 또 무엇이였던가?


희로애락


에루와 어절씨구 좋구나 좋네

해란강도 노래하고 장백산도 춤을 추네…

홍종우의 입에서 느닷없이 코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점심식사후 모처럼 차례진 휴식시간에 지청룡과 벌린 한판 승부에서 멋들어진 장훈을 선사한것이다.


설날 아침에 찰떡을 치다가 떡판이랍시고 구해놓은 대리석걸상을 “와지끈!” 동강내버렸던 홍종우였다. 이사도에 와서 훈련하던중 1964년의 설을 맞이하게 된 길림성축구팀의 선수들은 한껏 들떠있었다. 웬 일인지 이런 날이면 더 각별히 민족의 전통음식들이 간절하게 생각났었다. 하여 그 대표적인 음식들가운데 가장 해먹기 쉬운 찰떡을 한번 만들어보자고 토론에 붙였는데 그게 만장일치로 통과되였던것이다. 그런데 근심거리가 생겼다. 떡메는 그런대로 나무를 얻어 하나 깎아 만들었지만 큼직한 통나무로 된 떡판이야 어디 가서 쉬이 구한단 말인가. 그래서 생각다 못해 식당앞마당에 놓여있는 하얀 대리석걸상을 깨끗이 닦아가지고 그우에 김이 문문 피여오르는 하얀 떡밥을 올려놓고 겨끔내기로 냅다 떡메를 휘둘렀다. 시골령감들처럼 이마에 질끈 수건을 두른 홍종우의 차례가 왔을 때였다. “떡판”주변을 빙 둘러서서 무슨 민속놀이대잔치라도 구경하듯 두눈이 휘둥그래서 두리번거리던 광동, 북경, 8.1 등 여러 팀 축구선수들중 어떤 싱거운 녀석 하나가 부지중에 무슨 큰 비밀이라도 발견한듯 “히히히” 뇌까려온것이다.


“아야마야(啊呀妈呀)! 이게 무슨 일인가? 돌걸상에다 떡을 치다니? 깨끗하다구 제일 떠들던 당신네 조선족들두 실은 알고보니까… 글구 이제 보니 그렇게 맛 있다는 찰떡두 결국 이런데다가…이건 쩐스(真是), 쯔쯧!…”


“무시게?”

그 말에 홍종우의 얼굴이 단통 붉게 상기되며 녀석을 향한 두 눈섭이 송충이처럼 꿈틀했다.

“제길, 네가 뭘 알아서? 체엣, 우리가 더럽다면 너네는? 좋다,너 이제 이 떡을 먹겠다고만 해봐라. 개자식!”

그리고는 더욱 보란듯이 손에다 침을 탁탁 뱉어가며 떡메를 단단히 잡고 냅다 “떡판”을 향해 두팔을 휘두르는데 “짱!” 하는 소리와 함께 그 대리석걸상이 “와지끈!” 하고 두동강이 났던것이다…


“하하, 여기 꽃편지가 왔소, 꽃편지!”

동경춘이 무슨 희한한것을 발견한듯 숙소에서 황급히 뛰쳐나오며 목청을 한껏 높였다.

“뭐? 꽃편지?”

방금전까지만 해도 홍종우와 지청룡이 마주한 장기판을 철통같이 둘러싼채 훈수에 열을 올리고있던 대원들의 눈길이 일제히 자석에라도 끌린듯 동경춘한테로 날아갔다.

“누구한테?”

“하하, 종섭이.”

“종섭이?”

“예?”

순간, 한쪽켠에 앉아 무슨 책인가 골똘히 읽고있던 정종섭이 화닥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루 갈려구?”

찰나, 몸집이 좋은 김석주가 제꺽 정종섭의 허리를 부둥켜안았다.

“자, 빨리 뜯어보라구, 빨리!”

어느새 정지승이 뛰여가서 동경춘의 손에 있는 편지를 와락 나꿔챘다. 문승학이며 김정식도 뒤질세라 정지승한테로 달려갔다. 한족인 당봉상만은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엉거주춤 장기판옆에 붙어선채로 그 어글어글한 두눈만 슴뻑거릴뿐이였다.


“야 참, 이걸 놓으십시오, 이걸!”

김석주의 쇠집게 같은 두팔에 단단히 몸을 잡힌 정종섭이 마구 몸부림을 쳐대며 발버둥질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쿠, 이 녀석이 발길질을 해대네.”

김석주가 결사적으로 몸부림을 쳐대는 종섭이한테 어마지두 급소를 얻어맞고 모래땅우에 벌렁 자빠지는데 곁에 있던 홍종우가 슬쩍 정종섭한테 안걸이를 먹였다.

“아야!”

정지승의 손에 있는 편지에만 도정신해있던 정종섭이 미처 어쩔 새 없이 모래불우에 동그라지는것과 함께 “와-” 환성이 터지면서 편지봉투가 찢어졌다.

“누구한테서 온거요?”

“빨리!”

“하하하!”

정지승을 둘러싸고 숱한 눈길이 강렬한 호기심으로 편지봉투를 주시했다. 정지승이 “어험!” 하고 건가래를 떼며 편지봉투를 등뒤로 감췄다.

“이거 남의 편지를 사사로이 보는건 위법인데…”

짐짓 엄숙한 모습이였다.

“아니?”

그 바람에 활기에 넘쳐 야단법석을 떨던 좌중이 물뿌린듯 조용해지는데 “저거 보우.” 하고 정지승이 종섭이한테로 턱짓을 했다. 모래불우에 퍼더버리고 앉아 아니꼬운 눈길로 뾰로통해서 동료들을 흘끔흘끔 쏘아보고있는 종섭이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여 있었다.

“쟤가 울잖소?”

“뭐, 운다구?”

“정말 우나?”

그러자 가슴 어딘가 띠끔해난 동경춘이 겅정겅정 뛰여가 정종섭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는데 “씨!” 하고 정종섭이 저만큼 홱 얼굴을 돌려버렸다.

“쳇, 그까짓 편지, 보겠으면 콱 보십시오. 련애편지도 아닌데 뭐.”

“련애편지 아니라구?”

“본다, 그럼?”

그 말에 정지승이 등뒤에 감추었던 편지봉투를 재빨리 눈앞으로 가져가더니 입가로 금방 웃음이 터져나왔다. “왕××”라는 발신인 이름 석자가 녀성의 유연한 필체로 단정하게 적혀있었던것이다.

“하하하… 이게 누구냐? 왕씨문 한족 같은데 이히히… 그래두 련애편지 아니라구?”

“네?”

정종섭은 그만 어안이 벙벙해지고말았다. 그도 근본 모르는 사람이였다.


그무렵 이사도훈련기지에는 기지내에 들어와 훈련하는 선수들은 나이가 28세 이상이 되여야 련애를 할수 있다는 성문화되지 않은 규정이 있었다. 그것도 해당 책임자(또는 지도부)의 허락이 떨어진 상황에서만 가능했다. 훈련을 제외한외에 매일 정치학습과 문화학습을 병행하고 밤마다 자신의 훈련, 학습, 생활 표현들을 “회보”한다는 이름하에 “생활반성회”가 열리는 때였으니 누군가 정말 련애편지라도 보내왔으면 큰일이 나게 생겼으니 종섭이로서는 놀라지 않을수가 없었다.


“아이쿠, 이게 뭐야?”

갑자기 좌중이 떠들썩해졌다. 편지봉투를 하늘높이 쳐들고 잔뜩 자웅눈을 한채 봉투안에 눈길을 주고있던 정지승의 얼굴우로 와르르 색종이가 쏟아져내렸던것이다. 알락달락한 각가지 색종이 꽃살들이 팽글팽글 맴을 돌며 모래불우에 떨어지고있었다.


“아니, 편지는 없잖소?”

“없어.”

“사진두?”

“그저 꽃종이뿐이야.”

“뭐?”

“에- 시시하다야…”


오락활동으로 휴식시간을 즐기고있는 길림성축구팀 선수들.


일순간 선수들의 얼굴에 어려있던 흥미진진한 기색이 대뜸 시들한 표정으로 바뀌여버리고말았다. “꽃편지”라고 하니 정종섭을 사모하는 웬 축구팬처녀가 련애편지에 사진이라도 넣어서 보내온줄로 알았었는데… 젠장. 그 바람에 몹시 무참해진 동경춘이 바삐 정지승의 손에서 편지봉투를 앗아가지고 재차 확인을 하다말고 부리나케 정종섭한테로 다가갔다. 종섭이는 저만치 나앉아 천연스레 아무 일도 없었다는듯 그저 책을 보는데만 열중했다. 동경춘이 그러는 정종섭을 툭 치며 시물시물 말을 붙였다.


“하하, 이제 보니 종섭이 너 뒤구멍으루 호박씨를 깐다. 훈련하구 책만 보는가 했더니…”

그런데 여직 책을 보는줄로 알았던 정종섭이 발끈하며 콕 내쏘았다.

“쳇, 이제 두구봅시다. 나두 동선생님 편지를 맘대루 뜯어보구 공포하지 않나.”

“엉?”

당사자가 아주 캄캄 면목도 모르는 어떤 처녀축구팬에게서 포르르 날아온 편지를 그만 입 빠르게 루설하는통에 공연히 종섭이로부터 미움을 산 동경춘은 순간 어쩔바를 몰라 멋적게 김석주의 얼굴만 바라보며 두눈을 슴뻑슴뻑 구원을 청했다. 그때 그들이 훈련하고있던 3호운동장옆 대나무숲으로부터 누군가 걸어나오며 꽥 소리를 질러왔다.

“어이, 거기서 또 골이 큰 사람들이 애를 울리고있는게나 아니요?”


길림성축구팀의 9번 유니폼을 입은, 자그마한 키꼴에 다부진 몸매를 가진 사나이가 대나무숲에 들어갔다가 죽순에 엉덩이를 찔렸는지 아니면 무엇이 묻었는지 연신 궁둥이를 털며 그들쪽을 향해 소리치고있었다.

“응? 저치는 또 어디 갔다 오는 길이지?”

“허경수? 강변에 갔다 오는 모양이야.”

과연 허경수였다. 물이 난 운동화의 신끈이 단단히 매여져있고 신끝에 젖은 모래가 가득 묻어있는것을 보니 강변모래톱을 몇 바퀴 질주하고 돌아오는것이 분명했다. 식사후이면 어김없이 거의 습관적으로 강변모래톱을 한바퀴씩 달리고 돌아오는 허경수,남들보다 체력이 한수 떨어져있는 그로서는 그게 대운동량훈련에 적응하는 유일한 방법이였다.


고향이 연길시 신풍촌인 허경수는 1938년 8월 20일, 한가난한 농가의 아들 3형제중 막내로 태여났다. 어릴적부터 축구에 천부적인 재질을 보여준 소년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째지는듯한 가난때문에 초중을 졸업하고 일찍 농사일을 시작한 그였지만 축구만은 잊지 않고 마을의 청년들을 휘동하여 촌, 향의 운동대회는 물론 시운동대회까지 휩쓸군 했다. 그러던 1957년, 그의 뽈재간이 소문이 나서 연변신화인쇄공장 축구팀에서 선수로 초빙했다. 그때로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축구에서 두각을 내밀기 시작했다.


중국대표팀 선수시절의 허경수.


축구운동의 전술체계가 비교적 락후했던 그 시기 그 무슨 전법이요, 기술이요 하는것을 운운하기 어려웠지만 우리 민족의 고유한 기질이라고 할가, 그때에도 일반적으로 공격형축구가 위주였었는데 일단 경수가 공을 몰고 들어간다 하면 대방의 수비 2~3명씩 따돌리는것쯤은 늘 볼수 있는 일이였다. 그것을 계기로 경수는 자신의 축구생애에서 일대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였다. 1958년

에 연변청년축구팀에 가입한 그가 3년후인 1961년에는 길림성축구팀에 선발된것이다.


신장 168센치메터

체중 68킬로그람

100메터 속도 12초 4

……


1958년, 연변청년축구팀이 전국청년축구대회에서 2등을 한 뒤를 이어 줄곧 연변팀에서 중앙공격수로 활약했던 허경수는 키도 별로 크지 않고 속도와 체질도 프로선수치고는 그닥 탐탁치 않은편이였지만 어릴적부터 능숙한 공다루기기술과 총명한 전술의식을 익혀온 보람으로 늘 대방 수비수들의 드센 방어속에서 밀리고 걸리여 쓰러질듯하면서도 용케 공을 몰고 빠져나가 기적같이 득점기회를 창조하는 “찰거마리”였다. 어딘가 내성적이지만 무슨 일이든 눈앞에만 닥치면 종내 끝을 보고야마는 그는 성격마저 “찰거마리”였다.


1963년, 전국축구 갑급팀련맹경기에서 료녕팀과의 관건적시합때 그만 급성맹장염이 도져서 지도진을 속 태웠던 그는 언제 보아도 팀에 없어서는 안될 절대적인 주력이자 노력가였다.


이윽고 동료들앞으로 털썩털썩 달려온 허경수는 목에 걸친 수건으로 이마에 돋은 땀을 대충 훔치고는 김석주에게 얼굴을 돌렸다.

“그래 류진석은 어떻다우? 좀 괜찮다우?”

“모르지.”

인젠 별로 재미 있는 일이 없는 모양 동경춘과 마주서서 심심파적으로 헤딩련습을 하고있던 김석주가 잠간 허경수한테 곁눈질을 하는 사이, 공이 발치에 떨어졌다. 동경춘이 불쑥 볼멘소리를 해왔다.

“박지도가 정말 너무했단 말이요. 글쎄 그게 무스게요. 사람이 쇠로 만든 기계가 아닌데. 그리구 아무리 기계라구 해도 그렇게 심하게 부리면…”


동경춘은 한쪽켠에 그냥 앉아 책을 읽고있는 정종섭을 흘끔 곁눈질하고는 계속 말을 이었다.

“오전훈련때 종섭이두 보우. 뽈을 주어오라 해가지구는 정작 주어오면 멀리로 탕 차버리구 그리고는 또 당장 가서 주어오라 호통치며… 야, 그래 너 그걸 몇번이나 주어왔던가?”


정종섭은 그러는 동경춘을 바라보며 그저 말없이 오른손을 쫙 펴보였다.

“다섯번?”

허경수가 중얼거렸다.

“하긴 박지도두 너무했단 말이요. 진석이가 물을 좀 마시구 훈련하겠다는걸 못 마시게 하구 계속 달리기를 시켰으니… 파쑈라니까, 파쑈!”

“그것두 어디 장거리유? 100메터를 번마다 최고속도로 돌파하라고 하니 아무리 무양(无氧)훈련이라 해도 세상에 어디 그런파쑈훈련이 있소.”

“아무튼 기지에서 보급된 훈련원칙이라니까 좌우지간…”

김석주가 이렇게 말하며 발치에 있던 뽈을 “탕!” 걷어찼다. 그리고는 붕 떠서 저만치 날아가는 뽈을 바라보다말고 털썩 잔디밭에 드러누웠다.


오전훈련때 이를 악물고 달리기훈련을 하던 류진석이 갑자기 입에 거품을 물고 잔디밭에 쓰러지던 광경이 그의 눈앞에 선히 떠오르고있었다.

“자, 30메터 다시한번, 휴식시간은 2초!”

“저, 지… 지도, 물을 좀…”

“안돼!”

“조… 조금만…”

“안된다는데두!”

“야, 목이 타는데…”

“안돼, 빨리!”

“아…”

석주는 찔끔 두눈을 감아버리고말았다.

저 멀리 주강가로부터 배사공의 구슬픈 민요가락이 들려오고 있었다…

(계속)


[신철국 장편스포츠실화] 챔피언 1965


차례(지난 기사는 클릭해 볼수 있습니다)

제1장 시련의 계단

봉변/기회의 신(神)결심출국 류학스승의 마음 문제는 어디에?축구의 고향 잊은것과 잃은것/ 어려운 세월에 제로의 답안 /맨발의 선수 첫발자국 /희망을 향하여 

제2장 재기의 언덕

“백전로장” 원수(元帅)가 준 별호 /최초의 전설들(1) 최초의 전설들(2) /

새로운 출발 /“3종1대”/개천의 룡들(1) 개천의 룡들(2)/ 이사도(二沙岛) 

희로애락 “몰인정”했던 리유 뒤로 밀린 리발 신입대원 정동권 

제3장 승자는 말한다

원자탄 불청객 분노의 벽 빅장대결 귀로의 기쁨 영광의 서장(1) 영광의 서장(2) 불멸의 승부(1) 불멸의 승부(2)




신철국

작가


연길명동문화예술원

부원장

【신철국 작가 프로필】

1971년 왕청현 하마탕향 전하촌(汪清县蛤蚂塘乡前河村)출생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 졸업


연변민족문학원(제1기/1994년), 로신문학원(제30기중청년고급연구토론반·아동문학/2016년) 수료.


‹중국조선족백년실록›집필위원회 위원(스포츠) 력임.


연변텔레비죤방송국 청소년부, '흑룡강신문','길림신문'에서 다편간 편집, 기자로 활약. 연변작가협회 회원.


1986년 아동소설 '신방주인'으로 등단.


'화신문학상','압록강문학상','흑토문학상','연변라지오문학상','상익컵 실화문학상' 등 수상경력 다수. 


단행본 장편스포츠실화 ‹챔피언 1965› 출간.


공저로 ‹60주년에 만난 60인›, ‹중국조선족백년실록›, ‹연변축구의 발자취를 찾아서› 등이 있음.


현재 명동문화예술원 부원장 겸 글짓기지도로 근무.


 안내 : "문학작품"은 sinbalam과 위챗친구하여 보내주시면 등재해드립니다.-신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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