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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철국 장편스포츠실화] 챔피언 1965 (15) "몰인정"했던 리유/뒤로 밀린 리발/신입대원 정동권

조글로 潮歌网 2020-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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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일련재

 신철국  장편스포츠실화 

-1965년 길림성축구팀 전국축구 갑급팀련맹경기 우승 실록


연변인민출판사


“몰인정”했던 리유


만부하로 전신지구력운동을 소화하고있던 류진석이 갑자기 쇼크할줄은 그야말로 뜻밖이였다.

(그래 내가 정말 너무했단 말인가?)

박만복은 그만 파도처럼 엄습해오는 허탈감에 빠지고말았다.

물, 그래 물 한모금을 못 마시게 한탓이라고 하자. 잘못이라고하자. 허지만 그들은 그 후과를 상상이나 하고있었을가? 알고나 있었을가? 한가슴 시원히 갈증을 풀어준 랭수 한모금이 때로는 독이 될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저, 박지도, 진석동무가 깨여났습니다.”

“깨… 깨여났다구?”

“네.”

박만복은 황급히 팀 의사 한영규의 옆으로 다가가 류진석을 바라보았다. 침대에 죽은듯이 누워있는 진석이의 창백한 얼굴은 말라붙은 땀자국으로 어룽어룽했다. 별스레 코끝이 찡하니 저려왔다. 연변대학 체육학부에서 교편을 잡고있다가 지난해 년말부터 길림성축구팀의 의사로 활약하고있는 한영규도 어딘가 측은한 표정이였다.

“저, 한선생님, 별일은 없겠지요? 진석선수가.”

“네, 그저 운동이 과도하여 심장부담이 커지는 바람에…”

“그럼 진석선수더러 오후에 푹 쉬도록 하십시오.”

“아니, 이젠 좀… 괜찮습니다. 오후훈련에는 그, 그냥…”

그때 류진석이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가까스로 몸을 움직였다.

“허 참, 이러지 말고…”

그러는 류진석을 한영규가 바삐 침대에 도로 눕히는데 잠자코 있던 박만복이 꽥 소리를 질렀다.

“왜 이래? 엉?”

“그, 그런게 아니라…”

“그럼 군말 말구 푹 쉬도록.”

그리고는 홱 몸을 돌려 문께로 뚜벅뚜벅 걸어가던 박만복이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한영규쪽으로 후딱 머리를 돌렸다.


“한선생님, 점심후에 저의 침실로 왔다 가십시오. 저한테 사탕가루가 좀 있는데 그걸 가져다 진석선수한테…”

그러면서 박만복은 “후-” 한숨을 내쉬였다. 까닭 모를 한숨이였다. 바야흐로 시작될 전국축구 을급팀련맹경기에 대비하여 이를 악물고 훈련에 돌입한 선수들한테 왜 이처럼 혹독해졌는지 자신도 모를 일이였다.

아, 물 한모금이 무엇이기에…

사실 물은 만물의 생장에 없어서는 아니될 생명수이긴 하지만 운동생리학적으로 말한다면 고강도운동중에서 인체가 제일 꺼리는것이 또한 물이기도 하였다. 갈증을 달래느라 두어모금 꿀꺽 꿀꺽 삼킨 물이 염분을 더욱 많이 배출시켜 심장부담을 가중시키는가 하면 인체에 복통과 함께 속병을 유발시켜 인체의 컨디션을 철저히 파괴해버리는 등 악과를 초래한다는것, 어찌 보면 달아오른 빈 가마에 랭수를 부어넣으면 금방 망가져버리듯 갈증을 덜어준 랭수 한모금이 금시 인체를 고장내버린다는 자연의 도리와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갈증을 호소하는 진석이한테 물을 못 마시도록 강요한 박만복이였다. 가차없이 “몰인정”을 베푼 리유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진석이가 그만 쓰러질줄이야!


주내에서 펼쳐진 어느 한차례 달리기시합에서 선수로 나선 류진석. 길림성축구팀 현역시절에 그는 속도가 빠르기로 소문났다.


박만복은 고민에 빠지고말았다. 자신이 내세운 대운동량훈련에 어딘가 회의가 생겼던것이다.


국제축구경기에서 우수한 선수들은 90분간의 경기에서 대략 만메터 좌우의 거리를 달린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놀라운 거리도 일반적인 조건하에서 달리는것이 아니라 밀치기와 견제가 동반되는 상황에서, 그중 2, 3천메터의 거리는 가속도달리기로 수행하지 않으면 안되는것이다. 그것도 달리는 방향과 속도는 공의 이동과 전술의 변화에 따라 수시로 급변한다. 뿐만아니라 달리는 과정에 급정지, 몸 돌리기, 에돌아 달리기, 속임동작 등으로 하여 그 속도에는 변화가 무쌍하다. 여기에 건장한 체질이 밑바탕으로 되여주지 않는다면 뛰여난 기술이나 전술이라도 도무지 발휘할수가 없는것이다.


그래서 박만복은 요즘 기술과 전술을 결합한 체력훈련에 모를 박고있는중이였다. 순발력과 지구력 양성이 그 주축을 이루고있었다. 축구운동은 륙상운동과는 달리 그냥 가속도로 뛰는것이 아니므로 체력훈련시 무산소적상태와 유산소적상태를 교대로 일으켜 호흡순환기능중의 심박출량(心搏出量)을 증가해야만 했다. 특히 운동시의 중간휴식훈련은 부하기(负荷期)는 물론 면하기(免荷期)에 있어서도 불안전한 휴식을 취하므로 면하기에 근육이나 신경 등의 기능은 일시적으로 휴식상태에 놓이게 되더라도 호흡순환기능은 휴식상태에 놓여있지 않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로써 무산소적부하와 유산소적부하를 교대하여 산소부하능력을 향상시키는것이다. 이른바 체능훈련에서의 중심고리였다. 한번 뼈저린 실패를 경험한 박만복으로서는 축구에서의 체력의 중요성을 고려하지 않을래야 않을수가 없었던것이다.


우리의 축구가 기로에 들어선 력사가 있지 않았던가.


1960년대 초기에 들어서면서 남방의 기술파축구의 흥기와 더불어 조선족축구팀들의 훈련지도사상에는 혼란상태가 일어나며 그릇된 편향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적지 않은 지도원들과 선수 그리고 축구팀들이 자기의 기술과 전술 풍격을 버리고 엉뚱하게도 남방축구팀들의 풍격과 방법을 본받아온것이다. 28세의 열혈남아 박만복이 사령탑을 잡은 길림성축구팀도 례외가 아니였다. 1963년 전국축구 갑급팀련맹경기를 대비한 1962년말-1963년초의 전지훈련에서 길림성축구팀은 맹목적으로, 기계적으로 기술훈련과 소범위내에서의 배합작전에만 주의를 돌리고 전면적인 체력훈련을 외면하는 바람에 여직껏 줄곧 보존하여온,훌륭한 체력으로 과감히 맞서 싸우는 특점을 잃어버리고만것이다. 그리하여 시합에서 후반전에만 들어서면 늘 속도가 떨어지고 경기를 치르기 어려워 결국에는 그해 련맹경기에서 15등으로 내려앉고말았다.


15등! 치욕이 아닐수가 없었다. 그 전해인 1962년 전국축구갑급팀련맹경기까지만 해도 5등을 하였던 길림성축구팀이 한해사이에 일락천장을 하여 을급팀으로 떨어졌으니…


그 전해 9월 중순, 북경 선농단체육장에서 있었던 1963년 전국축구 갑급팀련맹경기 제2단계 상해팀과의 시합에서였다. 시합개시를 알리는 주심의 호각소리가 울린지 이슥한데 사전부터 별볼 멋이 없는 경기로 알려졌던 모양인지 관중석이 텅 비다싶이 했다. 마침 그때 축구공이 상해팀 선수의 발에 맞아 밖으로 튀여나와 길림성축구팀의 던져넣기로 판정되였다. 순간, 그 공을 따라 눈

길을 주다말고 무심결에 주석단을 바라보던 박만복은 깜짝 놀라고말았다. 그의 시야에 익숙한 모습을 한 년장자 한분이 안겨왔던 것이다. 둥글넙적한 얼굴에 그무렵 전진모(前进帽)라 불리던 캡을 눌러쓴 그분은 다름아닌 주장-주덕해어른이였다. 한산한 주석단 한쪽 끝머리에 혼자 외롭게 앉아 말없이 엽초를 말고있는 그를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며 박만복은 세차게 뛰는 가슴을 어찌했으면 좋을지 몰랐다. 북경에 회의차로 왔다가 마침 길림성축구팀이 시합을 한다는 말을 듣고 그 먼길을 친히 찾아왔던 주덕해주장, 그런데 그의 간절한 기대와는 달리 그번 시합에서 길림성축구팀은 연거퍼 내리 세꼴을 허락하며 무릎을 꿇고말았다…


박만복은 그때 일을 생각하며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뒤로 밀린 리발


잔뜩 마음을 들뜨게 하던 “꽃편지사건”이 아주 멋없이 흐지부지해지자 무척이나 시들해진 정지승은 곧장 숙사안으로 들어와버렸다. 문득 새삼스레 오른쪽발목이 따끔따끔 통세가 났다. 그는 얼른 세면실로 들어가 랭수 한 대야를 받아가지고 그속에 발목을 집어넣었다. 금시 온몸에 한기가 쫙 끼치며 등줄기가 오싹해나서 진저리를 쳤다. 그때 복도로부터 건드러진 노래가락이 흥얼흥얼 들려왔다.


동풍이 불어온다 세월이 좋을시구

도문강 칠백리에 경치도 좋지마는

쇠돌을 캐여내는 남포소리가 더 좋구나…


(아니, 장수가?)

정지승은 금방 그 노래의 임자를 알아맞힐수가 있었다. 일단 노래가락을 뽑을라 치면 청청히 서너가락을 넘기지 않고서는 직성을 풀지 못하는 박장수, 그 위치 그대로 문지기답게 실팍한 몸집에 장대처럼 큰 키꼴에다 손바닥 또한 가래짝처럼 넙적한 그가 부리부리한 두눈을 뚝 부릅뜰라 치면 꼭 마치 고전소설 《림꺽정》에나오는 청석골 화적이 환생하지 않았나싶다. 발도 류다르게 볼이 넓고 길죽하여 자그만치 44호짜리 신을 신어야 했다. 여간 구하기가 쉽지 않은 대짜배기였다. 그런 박장수가 지금 흥이 도도해서 노래를 흥얼거리며 복도를 걸어오고있는것이다. “쿵쿵” 벽을 울리는 발자국소리를 들어봐서는 정지승의 침실쪽으로 걸어오고있는듯 했다. 그런데 문득 노래가 뚝 끊어지더니 걸음소리가 급촉해졌다.

아마도 무슨 일이 있는 모양 같았다.

(혹시 나를 찾아오는건가?)

정지승이 그냥 머리를 숙인채로 대야에 담근 발목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귀를 강구는데 아니나다를가 그 발자국소리는 침실 문앞에 이르러 뚝 끊어졌다. 뒤미처 “똑똑똑”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있나?”

확성기에서 울리는 음성처럼 우렁우렁한 목소리였다.

“누구야?”

진작 그 장본인이 누군지 알면서도 지승은 짐짓 모르는체 능청을 떨었다. 그러자 대꾸없이 벌컥 문이 열리며 박장수가 허리를 꺼꺼부정해가지고 들어섰다.

“어이쿠, 대낮에 발을 씻는가? 낮잠 한번 잘 자려구?”

대야에 발을 담근 정지승을 보자 박장수가 문께를 넘어서다말고 조금 웃음기어린 시선으로 정지승을 바라보았다. 해도 정지승은 들었는지말았는지 가타부타 말이 없이 고개를 수그린채 발목만 열심히 문질렀다.

휴식시간을 함께 보내고있는 정지승(좌)과 박장수(우)


“왜, 그냥 아파?”

그제야 어딘가 쌩한 분위기를 파악한듯 박장수가 정지승한테로 조심스레 다가갔다.

“이 발목… 약을 쓰지 않아도 괜찮을가?”

박장수가 무척 관심조로 나오는데 지승이 참지 못하겠다는듯 퉁명스레 반문을 던졌다.

“무슨 일이 있어?”

그 말에 박장수는 조금 놀라는듯하더니 털썩 침대에 주저앉아 신경질적으로 북북 머리를 긁적거렸다.

“어이, 이걸 좀 검질해달라구.”

“머리?”

“음, 요즘 날씨가 어찌나 무더운지 통…”

여적 고개를 수그리고만 있던 정지승이 그제야 점잖게 박장수를 바라보며 느럭느럭 입을 열었다.

“오, 그러니 시원하게 중머리를 해달라는 말이지?”

“아따, 이 자식이, 내가 언제?…”

“하하하!…”

정지승은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말았다. 요즘 류행하는 머리스타일은 이러이러하니 여차여차하게 깎아야 한다며 은근슬쩍 박장수를 꼬드겨서 잘 먹어들지도 않는 구식리발기를 손이 아프도록 재깍거리던 일이 부지중 떠올랐던것이다.


대원들의 생활을 담당한 대장으로서 머리 깎는 기술을 익혀두어야 하겠는데 모실만한 스승이 없는 상황에서 별수없이 독학의 길을 택하고 어느 화창한 날에 그 실습용으로 박장수를 구슬렸는데 웬걸, 리발기가 탈이였던지 아니면 서툰 솜씨때문이였던지 하여간 조심스럽게 뒤덜미에 갖다대고 두어번 재깍거린 리발기가 글쎄 장수의 머리카락을 꼭 집고 놓아주지를 않을줄이야.

“아이고, 아이고고!…”

생뚱같이 생머리를 뜯기운 박장수는 나 죽는다고 냅다 고함을 질러댔다. 그 바람에 당황해난 정지승은 죽어라고 리발기만 더욱 재깍거리고…

“흐흐흐, 또 생머리를 뜯기우자구?”

“젠장, 깎아주겠어, 안 깎아주겠어?”

“암, 깎지, 깎아. 근데 시간이…”

“그냥 좀 추리는데두?”

“글쎄…”

그러는데 공교롭게도 밖에서부터 맵짠 호각소리가 들려왔다.

오후훈련집합을 알리는 박만복의 호각소리였다.

“젠장, 머리 다 깎았다.”

“쳇, 또 죽었다, 죽었어.”

“어이쿠…”

또 간고한 훈련이 시작되였다. 끝날줄 모르는 훈련의 련속이였다.


그무렵 이사도기지로 전지훈련을 나온 북방의 각 팀들은 “3종1대”훈련원칙을 견결히 관철하고 세가지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상(고생, 어려움과 부상을 두려워하지 않는것을 가리킴)을 수립하며 다섯가지를 억세게 틀어쥐여(기초실력을 높이고 신체소질을 증강하며 훈련작풍을 강화하고 시합에서의 박투정신을 고양하며 전술배합을 제고하는것을 가리킴) 훈련사업에서의 혁명화를 실현한답시고 선수들을 혹사시키고있었다.



신입대원 정동권


“1964년 2월 19일(음력 1월 7일). 비가 내림.

오늘은 24절기중의 하나인 우수이다. 우수, 경칩에 대동강이 풀린다는 속담이 있지만 이곳 날씨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는것 같다. 이곳은 겨울이라고 해도 눈이 아니라 비가 내리고 꽃이 피니말이다. 어제 낮기온은 령상 20도였는데 오늘은 쌀쌀했다. 이곳은 대기중에 습기가 많아 기온이 내려간 날이면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몸이 으슬으슬 떨리군 한다. 아침을 먹으러 식당으로 가면서 안면이 있는 북경청년대 선수 ×××를 만났다. 그는 오늘 낮기온이 15도로 내려갔다며 비가 올 징조라고 했다. 자기네는 비가 오면 실외훈련을 취소한다면서 ‘당신들은 이런 날에도 바깥훈련을 하던데 대운동량훈련이 진짜 장난이 아니다!’고 혀를 끌끌 차며 머리를 흔드는것이였다. 아마 훈련에 지쳐 힘들게 걷는 나를 보고 동정이 갔던 모양이다. 나는 그냥 웃어넘겼다. 이제 정식시합에서 만나거들랑 그때 어디 두고보자…


아침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아니나다를가 비가 내리고있었다.

지난해 급성맹장염으로 수술을 받았던 허경수는 흐린 날씨에 수술자리가 쑤시는지 얼굴을 찡그린채 밖을 내다보고있었다. 근심어린 표정이였다. 하지만 비속에서도 우리의 훈련은 예정대로 진행되였다…”


정동권은 일기를 쓰다말고 잠시 창밖을 응시했다. 부슬부슬 이슬비가 흩날리고있는 창밖에는 잉크빛어둠이 짙게 깔려있었다.

주강나루터에 정박해있는 나루배들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반디불처럼 희미하게 깜빡거리고있었다.


정동권이 북경로동자축구팀에서 길림성축구팀으로 자리를 옮긴지도 어느덧 4개월을 훌쩍 넘어서고있었다.

각종 운동기자재를 리용한 력량훈련과 속도훈련, 내력훈련 등 정규적인 훈련프로그람을 차례차례 소화한 뒤에도 400메터 거리를 열번씩이나 주파하다보니 온몸은 마치 천근무게나 되는듯 무거워났다. 삭신이 여기저기 욱신거렸다. 동료선수 대부분이 저녁술을 놓기 바쁘게 털썩털썩 자리에 드러누웠지만 정동권은 그래도 지친 몸을 이끌고 조용히 책상에 마주앉았다. 일기책을 꺼내놓고 만년필뚜껑을 열었다. 오래전부터 객지생활을 해오면서 배여온  습관이였다. 하루동안 자기가 해온 일과를 총화 짓고 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어쩌면 그한테 있어서 향수(乡愁)와 피로를 달래는 약제이기도 했다.


길림성축구팀 선수시절의 정동권.


1935년, 화룡현 서성구(현 화룡시 서성진) 북대촌에서 부친 정학주, 모친 리택습의 자녀 4남매중 막내로 태여난 정동권은 1949년에 연변고중(당시 룡정시에 위치)에 입학하면서 지도 박만복의 1년 후배로 됐다. 어릴적부터 축구를 혹애했던 정동권은 소학교 4학년 시절에 학교축구팀의 대표선수에 이름을 올렸고 그 경력은 그후 그가 초중, 고중에 진학한 뒤에도 쭉 학교축구팀의 대표선수로 활약하는데 한몫했다. 특히 연변고중시절에는 선배 박만복과 마찬가지로 연변체육계의 거목 채송철선생의 문하에 들어가면서 축구와의 인연을 두텁게 쌓아갔다.


학교대표팀과 연길현(현재 룡정시)대표팀에서 공방템포를 책임진 중원의 지휘자로서 졸업할 때까지 수시로 그라운드를 누비던 정동권은 1956년 3월, “1선도시”1) 여서 남들이 기피하고있던 흑룡강성 치치할시의 모 병기공장에 림시기술원으로 배치받았다.


1) 당시 중쏘관계에 금이 실리면서 전쟁위험이 고조되였었다. 따라서 전쟁위험가능성에 따라 지역을 구분했는데 쏘련과 변경을 사이 두고있는 지역은 1선도시로, 북경, 천진등은 2선도시로, 성도, 중경, 서안 등은 3선도시로 분류되였었다.


전쟁위험지역이라는 불안감때문에 집안 식구 모두가 근심되여 만류하였지만 정동권은 조직의 배치에 따라 약 반년간 병기공장에서 착실히 기술원노릇을 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야말로 “인생대역전”을 맞이하는 기회가 찾아왔다.


9월 중순께의 어느 하루였다. 그무렵 중국축구 을급리그에서 활약하고있던 전국 화성축구팀(全国火星足球队)이 동북순회시합차로 치치할시를 방문하면서 주요 행사의 하나로 치치할대표팀과 평가전을 치르게 되였다. 이에 앞서 화성축구팀의 순회시합 요청을 받은 치치할대표팀은 시합에 대비해 시내 각곳에 흩어져 있는 우수축구애호가들을 불러들여 팀을 구성했는데 그속에 정

동권도 들어있었다. 더러 휴식시간을 리용해 축구를 즐긴것이 남들의 눈에 띄였고 그 축구재능이 지역내 축구애호가들한테서 입소문을 타면서 쟁쟁한 축구인으로 널리 알려졌던것이다. 그후 치치할시에서 알아주는 축구인으로서 여러 축구시합에 주력선수로 가끔 등장했던 정동권은 당연히 그번 화성축구팀과의 시합에 선발로 출전해 그라운드를 누비게 되였다. 그는 연변고중대표팀 선수에다 연길현대표팀의 핵심선수로 활약했던 신분에 부끄럼없이 멋진 플레이로 륙속 명장면들을 연출해냈다. 하지만 축구운동은 어느 한 개인의 힘보다는 집단적인 노력을 요하는 운동이여서 아무리 그가 사력을 기울여도 림시조합된 팀으로서는 리그팀인 화성축구팀을 당할수가 없었다. 결국 0대2로 무릎을 꿇으면서 실력의 장벽을 실감했다. 그런데 문득 화성축구팀의 책임자가 정동권을 찾았다. 왜 찾아왔는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떨떠름해있는 정동권한테 그 책임자가 다짜고짜 자기 팀에 들어와 함께 축구를 해볼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화성축구팀은 북경시에 본부를 두고있고 전국적으로 가장 호화로운, 유일하게 잔디가 깔린 선농단체육장 부근에 기숙사가 마련돼있다면서 은근슬쩍 유혹도 곁들였다.


(북경?…)

쏘련과의 전쟁위험으로 흉흉한 소문이 나돌고있는 이른바 “1선도시”를 떠나, 그것도 오매불망 마음속으로 동경해마지않던 수도 북경에 갈수 있다는 생각에 정동권은 일순 마음이 동했으나 인츰 그 흥분을 가라앉히고 사무적인 어조로 대꾸했다.

“저는 다만… 조직의 결정에 복종할뿐입니다.”

“호우(好)!”

동권이의 대답에 그 책임자는 크게 한번 고개를 끄덕이고는 흡족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며칠뒤 동권이한테 전근령이 떨어졌다. 새로운 근무지는 전국 화성축구팀이였다. 이 전국 화성축구팀이 후날 북경로동자축구팀(北京工人足球队)으로 이름을 바꾸고 전국축구 갑급리그에까지 진출하게 되는데 거기에는 물론 정동권의 노력도 깃들어있었다. 


그렇게 1963년말까지 장장 8년 동안 북경에서 축구를 해오던 정동권은 어느날 불행한 소식을 접했다. 도문철로에 출근하고있던 형님이 몹쓸 병마에 걸려 세상을 하직했다는 소식이였다. 슬픈 심정으로 형님을 떠나보낸 정동권은 또다시 삶의 근거지를 옮겨야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였다. 여적 형님네 집에 기거해있던 년로한 부모님을 그가 모셔야 했기때문이였다. 아들로서 부모님을 모셔야 하는것은 응당한 일이였지만 그렇다고 여태껏 걸어온 축구인의 길을 접어두고 그냥 그대로 돌아올수가 없었다. 


고향 연변에 본부를 두고있는 길림성축구팀으로의 전근이 당시 그의 형편으로 볼 때 가장 안성맞춤한 길이였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그의 생각일뿐이였다. 그때 그의 어려운 처지를 알고 그를 길림성축구팀의 신임지도 박만복에게 추천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길림성축구팀의 주장 지운봉이였다. 오래전에 정동권과 면목을 익힌 사이인 지운봉은 중원을 책임질 팀의 허리께위치에 선수가 부족하다는 실정을 강조하면서 박만복에게 동권이를 적극 추천했다. 


오랜 경험과 실력들을 구비한로장들이 륙속 은퇴하면서 비워진 자리를 신진들이 미처 메우지 못해 신로교체가 어렵게 진척되고있는 길림성축구팀인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해(1963년) 을급팀으로 강등하는 사고까지 일어났다. 설욕을 위해 재기를 다짐하고 나선 박만복으로서는 팀의 요소요소에 적합한 팀원을 물색해 배치하는것이 갈급했다. 그래서 운봉이가 동권이를 추천하자 적극적으로 검토해보기 시작했다. 연변고중시절 선후배관계였지만 당시에는 서로 알지 못했던 사이였다. 박만복이 정동권을 알게 된것은 그가 웽그리아에서 축구류학을 마치고 국가팀(홍팀)을 거쳐 북경팀에서 활약하던무렵이였다.


그의 축구재능도 재능이거니와 특히 그의 위치가 중원의 공방절주를 책임진 허리께라는데서 박만복은 무릎을 탁 쳤다. 중원의 해결사노릇을 톡톡히 하고있는 팀의 령혼 지운봉과 함께 호흡을 맞출수 있는 적임자를 찾았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또 그의 딱한 사정을 지운봉으로부터 전해듣고 마음에 걸려 어떻게 도움을 주면 좋을가 걱정하고있던터여서 그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방법이 생겼으니 그럴만도 했다. 박만복은 즉시 상급에 정동권을 길림성축구팀에 들여올것을 제의했다. 그렇게 정동권은 조직적인 절차를 밟은 뒤 1963년말에 북경에서의 8년 생활을 접고 길림성축구팀으로 “귀향”했다.


정동권은 계속 일기를 써내려갔다.

“…오후에 국가대의 지도 두 사람이 우리 대의 훈련상황을 알아보러 왔다. 우리가 한창 문쏘기(슛)훈련을 할 때였다. 내 차례가 돌아와서 재빨리 달려나가며 김정식이 옆에서 넘겨주는 뽈을 그대로 받아 찼는데 그만 물에 젖은 공이 발에 빗맞으며 문대우를 날아갔다. 그러자 내뒤에 서있던 박지도가 한바탕 나를 욕하는것이였다. 나는 마음이 상했지만 꾹 참고 계속 훈련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만약 정식시합에서 이렇게 했다간 대사를 그르칠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직도 우리 대의 여러 선수들과 익숙하지 못하다. 그리고 또 많은 선수들이 지방관념이 강해서 나를 은근히 배척하고있다. 나는 아직 주력으로 되지 못했지만 꼭 훈련을 열심히 하여 정식시합에서는 주력으로 나서도록 하겠다. 축구선수라면 우선 재능을 잘 키우는것이 첫째라고 본다. 재능만 뛰여나면조만간 주력으로 나설수 있을것이다…”


정지승과 함께 공쟁탈을 하고있는 정동권(좌).


“드르릉, 드르릉…”

그때 어디선가 본격적으로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동권이 바삐 일기책을 덮고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보니 좀처럼 코를 골지 않던 문승학이 반쯤 눈을 치뜬채 열심히 코를 골고있었다. 얼결에 침대머리에 놓인 일명 “사발시계”라 불리는 자명종을 보았더니 어느새 시침이 열한시를 가리키고있었다.(계속)


[신철국 장편스포츠실화] 챔피언 1965


차례(지난 기사는 클릭해 볼수 있습니다)

제1장 시련의 계단

봉변/기회의 신(神)결심출국 류학스승의 마음 문제는 어디에?축구의 고향 잊은것과 잃은것/ 어려운 세월에 제로의 답안 /맨발의 선수 첫발자국 /희망을 향하여 

제2장 재기의 언덕

“백전로장” 원수(元帅)가 준 별호 /최초의 전설들(1) 최초의 전설들(2) /

새로운 출발 /“3종1대”/개천의 룡들(1) 개천의 룡들(2)/ 이사도(二沙岛) 

희로애락/ “몰인정”했던 리유 뒤로 밀린 리발 신입대원 정동권 

제3장 승자는 말한다

원자탄 불청객 분노의 벽 빅장대결 귀로의 기쁨 영광의 서장(1) 영광의 서장(2) 불멸의 승부(1) 불멸의 승부(2)









신철국

작가


연길명동문화예술원

부원장

【신철국 작가 프로필】

1971년 왕청현 하마탕향 전하촌(汪清县蛤蚂塘乡前河村)출생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 졸업


연변민족문학원(제1기/1994년), 로신문학원(제30기중청년고급연구토론반·아동문학/2016년) 수료.


‹중국조선족백년실록›집필위원회 위원(스포츠) 력임.


연변텔레비죤방송국 청소년부, '흑룡강신문','길림신문'에서 다편간 편집, 기자로 활약. 연변작가협회 회원.


1986년 아동소설 '신방주인'으로 등단.


'화신문학상','압록강문학상','흑토문학상','연변라지오문학상','상익컵 실화문학상' 등 수상경력 다수. 


단행본 장편스포츠실화 ‹챔피언 1965› 출간.


공저로 ‹60주년에 만난 60인›, ‹중국조선족백년실록›, ‹연변축구의 발자취를 찾아서› 등이 있음.


현재 명동문화예술원 부원장 겸 글짓기지도로 근무.



 안내 : "문학작품"은 sinbalam과 위챗친구하여 보내주시면 등재해드립니다.-신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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