查看原文
其他

[신철국 장편스포츠실화] 챔피언 1965 (16) 원자탄/불청객

조글로 潮歌网 2020-09-15

 조글로   

       이슈 단체 인물 비즈 문학 력사  

제보광고검색pc버전| 건강|노래珍藏版|web



토일련재

 신철국  장편스포츠실화 

-1965년 길림성축구팀 전국축구 갑급팀련맹경기 우승 실록


연변인민출판사


길림성축구팀이 우승을 따낸 감격의 날. 첫줄: 좌로부터 한수은(코치),길림성체육운동위원회 주임 료운주, 지운봉(팀 주장), 정지승(팀 부주장), 길림성체육운동위원회 비서장 김춘산, 연변체육운동위원회 주임 황택균, 박만복(주감독). 두번째줄: 좌로부터 리창린(지도), 한영규(의사),리룡운, 최성룡, 류진석, 정종섭(국가팀 선수), 문승학, 문형덕, 동경춘,허경수(국가팀 선수). 세번째줄: 좌로부터 홍종우, 문학길, 최창국, 박성규, 정동권, 리범룡, 정순도. 네번째줄: 좌로부터 박장수(주력문지기), 김석주, 김윤철, 라산묵(후보문지기), 지수길(후보문지기), 지청룡, 김정식(국가팀 선수), 당봉상(한족, 국가팀 선수).


원자탄


광음여류(光阴如流).

성구 그대로 류수같이 흐르는것이 세월이라 하지만 혹독한 “훈련지옥”에서 육신을 혹사하고있는 길림성축구팀 선수들한테 있어서는 그 세월이 눈 먼 달팽이의 걸음처럼 더디기만 했다.


4월 12일.

그래도 1964년 전국축구 을급팀련맹경기가 첫 봉화를 지피는 격동의 날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올해는 우리 길림성축구팀에 있어서 성공의 해로 기록될것인가? 행운의 해로 다가올것인가?

박만복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까스로 눅잦히며 올해에는 기어코 갑급팀에로 복귀하리라고 두주먹을 우드득 소리나게 불끈 쥐였다.


과연 박만복의 짐작대로 1964년 전국축구 을급팀련맹경기는 초반부터 치렬하게 격전이 오갔다. 확확 단내가 풍겼다. 팽팽하게 당기여진 활시위가 경기장의 분위기라면 그라운드에 나선 선수들은 그 시위에 메워진 화살 그 자체였다. “절대적으로 심판에 복종하고 상대방을 존중하며 공을 빼앗길지언정 남을 상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경기장 플레이어정신을 강조하던 그무렵, 중국축구협회에서는 을급팀련맹경기 8강결승전에서 앞 순위 1, 2위 두 팀만 갑급팀으로 진급할수 있도록 진급시스템을 가동하고있었다. 진급팀 수는 제한돼있는데 전국 각지에 웅거해있는 신예와 베테랑들은 저마다 저희들도 한몫을 노리고있다며 여기저기에서 격앙된 사자후로 “충아(冲阿, 돌격)!”를 웨치고있었다. 북경, 상해, 천진, 광주, 동북, 중남, 화동 등 전국 8개 경기구에서 내노라 하는 국내 86개 을급팀이 전신무장을 한채 “황소들의 싸움”으로 치렬하게 각축전을 벌리고있었다.


하지만 광주 이사도에서의 “마귀훈련”기간에 철저하게 “3종1대”원칙에 립각해 절치부심의 노력으로 차돌같이 탄탄하게 몸들을 만들어온 길림성축구팀은 무적의 군단을 예고하며 파죽지세로 내달리고있었다. 잠시 호적을 붙인 동북경기구에서 길림성축구팀은 돌풍 그대로 13승 1무 불패의 성적(27점. 당시 2점제.)으로 8강에 선착하며 강팀평정에 신호탄을 쏘았다. 용맹하고 완강하며 쾌속공격을 구사하는 우량한 전통풍격들이 시합 곳곳에서 슬슬 부활하기 시작했고 게임이 한차, 두차 심입됨에 따라 “훈련지옥”에서 갈고 닦은 체력 또한 복날에 보신탕을 먹은듯 진득하게 은을 냈다. 길림성축구팀의 선수들이 매 껨에서 평균 7,000메터의 이동거리를 기록하고있다는 얘기에 조사연구를 나온 중국축구협회 전문가들이 혀를 내둘렀다. 간판공격수인 “제비” 동경춘이 련맹경기를 앞두고 진행한 훈련성과검열대회에서 총 2만 9,889메터를 기록했는데 그중 9,987메터는 막판에 전속력으로 내달리는 이른바 스퍼트(冲刺, 달리기나 수영 따위에서 어떤 지점에서부터 전속력을 냄.)로 마무리했다는 설명에는 입을 딱 벌리기까지 했다.


연변의 당정지도일군들과 축구팬들의 관심도 전에없이 비등했다.


8월 2일부터 23일까지 연길시인민체육장과 연길현(지금의 룡정시)인민체육장에서 펼쳐진 동북경기구 제3단계 개막 당일에는 무려 3만 5,000여명의 축구팬들이 몰려들어 대성황을 이루었다. 그속에는 중공연변주위 제1서기 주덕해, 주위 서기처 서기 전인영, 부주장들인 리호원, 조룡호, 중공연길시위 서기 김기석 등 주, 시 당정지도자들도 연변의 특급축구팬으로 나서서 응원에 열을 올렸다.


8월 28일!

대망의 결승전을 약 2개월 앞둔 쾌청한 날.

“올해에는 어떡하나 꼬―옥!”


연길시인민체육장에서 있은 길림성축구팀시합의 한 장면.


주체육운동위원회 황택균주임이 으스러지게 박만복의 두손을 틀어잡았다.

“네, 기대에 어긋나지 않겠습니다.”

박만복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국가체육운동위원회, 전국총공회, 교육부, 공청단중앙위원회에서 공동으로 전국축구사업회의를 열고 “축구운동을 널리 펼쳐기술수준을 신속히 끌어올리자”고 전국에 호소한 1964년, 북경,상해, 천진, 광주, 려대, 심양, 남경, 매현과 더불어 전국 10대축구운동개발중점지구의 하나로 확정된 연변의 축구를, 조선족축구의 정수를 이제 세상에 다시 드러내보일 때가 온것이라고 박만복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랬다. 그냥 그대로 두어서는 도저히 치유할수 없는 1년전의 그 뼈 아픈 굴욕을 경도(硬度)가 높은 연마석으로 간주하고 불볕과 땡볕에서 그리고 폭풍우속에서 손톱, 발톱을 갈았던 길림성축구팀의 용장들을 향해 이제 설욕의 그날이 분명 서서히 다가오고있었다.


바로 그때!

전국 상하를 격정과 흥분의 도가니에 몰아넣는, 인심을 격동시키는 전대미문의 특대소식이 북경에서 전해왔다. 신화사가 터뜨린 대문짝만한 “신문공보(新闻公报)”였다.


【북경 16일발 신화사 통신】 1964년 10월 16일 15시(북경시간)에 중국은 자국의 서부지역에서 원자탄 하나를 폭파시켜 첫 핵시험에 성공하였다.중국에서의 핵시험 성공은 국방을 강화하며 조국을 보위하는데 있어서 중국인민의 중대한 성과이며 또한 세계평화수호사업에 대한 중국인민의 중대한 공헌이다.


중국의 로동자, 기술인원, 과학일군 및 국방건설에 종사한 모든 사업일군 그리고 전국 각지 각 부문들에서 당의 령도하에 자력갱생,분발노력의 정신을 발양하여 신근히 로동하고 극력 협조한데서 이번 시험이 성공할수 있었다.


중공중앙과 국무원에서는 그들에게 열렬한 축하를 보냈다.

“와-”

온 나라가 열광했다. 박만복도 격동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원자탄이라니! 세계 최고의 군사력을 상징하는 무기가 아닌가? 우리 길림성축구팀도 언젠가는 꼭 중국축구계에 “원자탄”을 터쳐보리라. 꼭 터뜨려보리라.


박만복을 비롯한 길림성축구팀 팀원들이 하나같이 원자탄의 폭발에 흥분으로 가슴을 들먹이고있을 때 감숙의 어느 한 두메산골의 자그마한 간이숙사에서는 한 조선족지질일군이 조용히 회심의 미소를 짓고있었다.


“김경모”라고 불리는 감숙성지질국산하의 주천(酒泉)지질탐사대 대원이였다. 1955년부터 중국에서는 비밀리에 핵계획을 추진하고있었다. 원자탄을 만들려면 단연 첫자리를 차지하는것이 우라니움이였다. 김경모가 몸을 담근 지질탐사대의 작업은 우라니움광석을 탐사하는것이였다. 극비작업이여서 탐사대원 1명에 해방군병사 2명이 근접수행을 했다. 탐사작업은 주로 지표의 방사성이상현상을 발견하고 추적수색을 진행해 진상을 밝히는것이였다. 솔직히 끝이 보이지 않는 따분한 작업이였지만 행운은 노력하는 사람을 비켜가지 않았다. 놀랍게도 김경모가 감숙성 경천현(泾川县) 일대의 산골에서 사암형(砂岩型)우라니움광석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때 그 고장의 사람들은 우라니움성분이 들어있는 바위로 담장을 쌓았고 지어는 집까지 짓고있었다. 그곳 사람들은 방사성의 영향을 받아 이름 모를 병을 앓기가 일쑤였다. 수명이 짧았지만 무슨 원인인지 잘 모르고있었다. 감숙성에서 최초로 되는 김경모의 그번 우라니움광석 발견은 전반 지질국을 들썽케 했다.


1964년 10월 16일, 중국 서부의 고비사막에 솟아오른 버섯구름에는 그렇게 한 조선족지질일군의 노력도 들어있었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서는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김경모가 조선족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별반 없었다. 안다고 해도 전해질리가 만무했다. 비밀에 비밀을 요했던 핵시험 자체가 극비중의 극비였기때문이였다.



불청객


중국이 원자탄 폭발로 핵시험을 성공한지 약 보름뒤인 1964년 11월 1일, 서남지구 최대의 공업도시 중경에서 드디여 전국축구 을급팀련맹경기 8강전이 막을 올렸다.


한겨울 추위에 배를 곯은 호랑이처럼 그리고 이제 막 동면을 마치고 나와 어정어정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는 곰처럼 각자 대방의 약점을 찾아 치명적인 타격을 노리는 그들, 짜장 모두가 살아움직이는 득점기계를 방불케 했다. 그중에서도 장백산천지물로 정기를 기른 사나이들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기염을 토하고있었다. 보리밭의 허수아비를 뽑아버리듯 고공행진으로 곧추 결승의 봉우리를 향해 치달아오르고있는 그들, 헌데 거기에서 뜻밖의 일이 그들을 기다리고있을줄이야.


결승전을 하루 앞둔 11월 17일, 호북성축구팀을 2대0으로 여유있게 제끼고 유쾌한 심정으로 기숙사로 돌아온 주장 지운봉한테 생각지 않던 손님이 불쑥 찾아들었다.


“운봉이, 그간 잘 있었나? 하하하!”

“아니, 이게 누군가?”

지운봉은 그만 두눈이 데꾼해지고말았다. 그를 찾아온 사람은 다름아닌 조서전(赵书田), 지난 1959년 국가청년축구팀에 합류해 있을 당시 한가마밥을 먹던 친구였다. 이번 시합에 남경부대를 대표해 참가했다는 말을 인편에 전해듣긴 했지만 워낙 시합임무가 긴장했던터라 아직 찾아가 인사를 나누지 못하고있던중이였다.


그런데 그가 먼저 찾아오다니.

“어이쿠, 자네가 웬 일로…”

지운봉이 급기야 반색을 하며 조서전을 맞아들이는데 조서전이 별스레 신비한 기색을 띠며 지운봉을 밖으로 끌었다.


“이봐, 좀 긴히 할 얘기가 있으니 우리 밖으로 나가자구.”

“밖으루? 왜?”

“글쎄 그런 사정이 좀 있어서 말이야.”

“사정?”

순간, 지운봉의 뇌리로 무엇인가 번개같이 지나가는것이 있었다.


결승전, 대망의 결승전 바로 그것이였다. 배치된 일정을 본다면 바로 이튿날 조서전이 주장을 맡고있는 남경부대축구팀과 결승전이 벌어지기로 되여있었다. 하다면 조서전이 찾아온 목적이설마…


사실 그무렵 길림성축구팀의 진급은 이미 정해진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제 남은것이 있다면 우승의 신분으로 갑급팀에 복귀하느냐 아니면 준우승으로 복귀하느냐 하는것뿐이였다. 말 그대로 한판의 승부를 내건 명예의 대결이였다. 허나 남경부대축구팀은 경우가 달랐다. 홈팀인 사천축구팀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운명이 길림성축구팀의 손아귀에 쥐여져있었던것이다.


만약 이튿날 결승전에서 길림성축구팀이 남경부대축구팀을 이긴다면 남경부대축구팀은 그냥 을급팀에 남게 되는 대신 사천축구팀이 갑급팀으로 올라오게 되는 “경우의 수”가 존재하고있었다. 그러나 만약 길림성축구팀이 남경부대축구팀과 빅거나 진다면 판도는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사천축구팀이 그대로 을급팀에 잔류하는 대신 남경부대축구팀이 1등, 길림성축구팀이 2등의 신

분으로 갑급팀에 진출하게 되는것이다.


“이봐, 어때? 그쪽은 이미 진급한거나 다름이 없잖은가. 우린 이번에 갑급팀에 올라가고 거기에 1등까지 하게 되면 월급이 한급이나 오른단 말이야.”

조서전이 발을 구르며 은근히 지운봉에게 매달렸다.

“글쎄…”

지운봉은 뭐라고 말할수가 없었다. 길림성축구팀의 진급에는 큰 영향이 미치지 않는다고 하지만 명예에 손상이 가는 경기를 치르고싶지 않았다. 한편 친구의 심정을 가히 리해할수가 있었지만 지도진을 몰리고 혼자서 서뿔리 결단을 내릴수도 없는 일이였다.


“좌우간 한번 알아보긴 하겠는데…”

“이보게 로형, 그저 말해보는게가 아니라니까. 그냥 빅어만 주면 돼.”

지운봉이 뜨직하게 나오자 조서전은 거의 울상이 돼가지고 안달을 떨었다.

“이번 빅장경기를 지도가 허락하지 않으면 선발로 나서는 선수들하구라도 좀 연통을 해서… 응?”

“글쎄…”

“어—허 참, 글쎄가 뭐유, 글쎄가.”

1940년, 청도에서 태여난 조서전은 팀에서 주로 우내공격수를 담당하고있었다. 조서전은 출중한 개인기에 힘입어 후날 국가대표팀에 발탁되기까지 하는데 현임 상항그룹축구구락부 총 고문(上港集团足球俱乐部总顾问) 서근보(徐根宝) 그리고 1982년부터 1984년까지 련속 3년간 갑급팀련맹경기에서 제1공격수로 선발돼 “신주제일각(神州第一脚)”이라는 미칭을 얻은 황덕흥(黄德兴)과 더불어 남경부대축구팀사상 가장 성공한 3명의 국가대표팀 선수중의 한명이기도 했다.


“글쎄…”

지운봉이 또 “글쎄” 하고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밖으로 부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동안 잘들 있었나?”

훤칠한 키꼴에 눈매가 어글어글한 그 사람은 다름아닌 8.1팀의 간판공격수 박광철이였다.

“아니, 박형이 여긴 어떻게?”

지운봉과 조서전이 바삐 말머리를 돌리고 반갑게 박광철을 맞아주었다. 박광철은 이상한 눈길로 조서전을 힐끔거렸다. 조선족들이 모여있는 길림성축구팀에는 무슨 속셈으로 찾아왔는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였다.


“아, 오래동안 얼굴을 못 봐서 그냥 심심풀이루 찾아온거지유.”

조서전이 머쓱한 표정으로 빙글거리다가

“그럼 두분이 이야기를 나누시오. 나는 훈련이 있어서…” 하고 바삐 말끝을 흐리며 돌아서다말고 박광철을 등진채 지운봉한테 무언의 암시로 한눈을 끔쩍해보였다. 제발 약속을 까먹지 말라는 뜻이였다. 지운봉은 조서전한테 시무룩한 기색으로 두어번 손을 흔들어 바래주고는 박광철한테 돌아섰다.


“그쪽 시합은?”

“아, 8일까지 전부 끝났어.”

“그래 몇등?”

“3등.”

“1등은?”

“북경체육학원.”

길림성축구팀의 지도 박만복과 함께 웽그리아에 축구류학을 다녀왔던 장경천(张京天), 장굉근(张宏根), 종자여(丛者余), 진가량(陈家亮), 손보영(孙宝荣) 등 거물급선수들을 대량 보유하고있는 북경체육학원팀은 사실상 국가팀이나 진배 없었다.


“2등은?”

“상해.”

“오…”

몰라서 묻는 말이 아니였다. 박광철이 조서전이 다녀간 내막을 알리는 없었지만 어쩐지 마음이 찜찜하여 번연히 아는 경기성적을 공연히 물어가며 어색한 분위기를 굼때고있는중이였다.


예상했던대로 중국축구 갑급무대는 역시 전통강팀들이 주름잡고있었다. 이제 갑급팀에 복귀하게 될 길림성축구팀도 새해에는 이들을 상대로 불꽃 튀는 접전을 벌여야 했다. 물론 박광철이 소속된 8.1팀도 례외가 아니였다.


1936년 11월 14일, 도문시교 “늪치”에서 2남1녀의 둘째아들로 태여난 박광철은 어린시절부터 삼촌의 영향으로 축구에 “입문”했다. 째지게 가난한 빈농가정이였지만 조막만한 고무공을 차면서 축구기술을 익혔다. 축구기술이라 해야 “논두렁축구”가 고작이였다. 그래도 부지런히 애를 쓴 덕분에 소학교, 중학교 시절에는 학교의 대표선수로도 제법 “끗발”을 날렸다. 초중을 졸업한 뒤 배치대로 연변한어사범학교에서 1년간 공부를 하고나서 1954년에는 도문제재공장축구팀에 들어갔다. 거기에서 몇달간 뛰면서 박광철은 공장 지도일군들의 눈을 확 뒤집어놓았다. 다듬어지지 않은 “논두렁축구”로 펄펄 날았던것이다. 이듬해에는 도문제재공장축구팀 선수로 동북제재공장계통축구경기에 참가해 우승컵까지 들어올렸다. 그것이 계기로 되였던지 박광철은 곧바로 연길현(현룡정시)축구팀 마금춘지도의 부름을 받았다.


1956년, 연길현축구팀의 일원으로 10월 27일부터 11월 7일까지 북경에서 펼쳐진 전국 8개 현 축구선수권대회에 참가했다. 그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연길현축구팀은 영광스럽게 국가체육운동위원회 주임 하룡원수의 접견을 받고 함께 기념사진을 남겼다.


1957년, 박광철은 연변청년팀 일원으로 7월 28일부터 8월 15일까지 천진에서 펼쳐진 전국 12개 단위 청년축구경기에 참가했다. 팀은 2등의 성적을 거두었다. 1958년, 연변축구팀에 입선된 박광철은 전국축구 을급팀련맹경기 연변경기구 분조경기에 참가했다. 그해 연변축구팀은 1등을 따냈다.


8.1팀 선수시절의 박광철.


1958년 6월 1일, 축구선수의 전성기를 보내던 박광철은 중국인민해방군 동북군구축구팀(심양부대팀 전신) 선수로 선발되였다. 1959년, 동북군구축구팀(갑급팀)의 멤버로 중국인민해방군경기대회에 참가하여 팀이 축구경기에서 1등을 따내는데 크게 기여를 했다. 1960년 6월부터는 당시 갑급팀 강팀이였던 해방군성년팀(8.1팀•북경)에 전근되여 주력선수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이때로부터 8.1팀에서 절대주력 측선공격수로서 10년간 그라운드를 누볐다. 그러던 1960년 12월, 그는 주은래총리의 친절한 접견을 받는 행운을 가졌다. 당시 중국—먄마 친선대표단(축구, 무술,영화, 가무, 불교 등 분야의 400여명 성원으로 구성) 일원으로 먄마를 출국방문했었는데 그번 친선축구경기를 마치고 축구팀은 중국—먄마 친선대표단 총 단장인 주은래총리의 친절한 접견을 받았다.


1963년에는 8.1팀의 선수로서 윁남에서 진행된 사회주의나라 군인축구경기에 참가했다. 축구선수로 뛰는 기간 그는 쏘련, 윁남, 먄마, 캄보쟈, 조선, 레바논, 인도네시아, 브라질, 알바니아 등 나라의 선수들과 친선경기를 펼쳤으며 8.1팀을 대표해 10여차의 출국방문경기에 참가했다.


8.1팀 지도들의 사심 없는 양성과 배려하에 기본기술, 신체소질, 전술의식 등 면에서 빠른 제고와 발전을 가져온 박광철은 강행돌파가 특기였던 재주를 뽐내며 지도와 부대 지도자, 광범한 축구팬들의 호평을 받았다. 1963년 3월, 국가체육운동위원회에서 발급한 축구운동건장칭호(당시 8.1팀에서 단 2명이 축구운동건장칭호를 수여받았음)를 수여받은 그는 이듬해 6월 20일에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박광철은 8.1팀의 맹장으로 활약하며 300차의 국내경기와 50여차의 국제경기에 참가했다. 8.1팀시절, 길림성축구팀의 요청도 수차 있었지만 부대 지도자들의 기대를 저버릴수는 없었다.


1969년말, 당시 군위 부주석이였던 림표의 요구에 의해 8.1팀이 해산을 선고했다. 조직에서는 10년간 8.1팀에서 뛴 공로와 재능을 여겨보고 박광철을 국가청년팀 지도로 배치했지만 그는 결국 전업을 선택하고 고향에 돌아왔다. 물론 이는 후날에 있은 얘기이다.


1962년, 전국 10명 공격수 합영. 조선족선수 리송봉(앞줄 우 1)과 지운봉(뒤줄 좌 3)이 들어있다.


“리순태, 리송봉… 그분들도 모두 잘 있지?”

“그럼. 이번에도 함께 시합을 했어.”


1960년에 축구운동건장칭호를 수여받은 리순태(李顺泰),1958년에 심양부대축구팀으로부터 8.1팀에 올라온 그는 1965년까지 팀의 주력수비로 활약했었다.


리순태와 마찬가지로 1960년에 축구운동건장칭호를 수여받은 리송봉(李松风) 역시 1958년에 심양부대축구팀으로부터 8.1팀에 합류하여 1964년까지 중앙공격수로 활약하면서 전국 10대최우수공격수(1962년)로서 8.1팀 력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조선족사나이였다.


“근데 여긴 어쩐 일로?”

갑급팀 강팀인 8.1팀이 전국축구 을급팀련맹경기에 나타날리가 만무한지라 지운봉이 자못 수상한 눈길로 박광철을 흘끔거렸다. 그제야 창문유리창에 이리저리 얼굴을 비춰가며 헝클어진 머리를 비다듬던 박광철이 늦게나마 해석을 달았다.


“아, 우리 청년대가 여기 있잖은가. 올해는 을급대 8강에 올라가지고 결승까지 들었다기에 걔들이 도대체 어느 정도인지 한번 좀 구경하고 오라는 상급의 지시가 있어서…”


그때 갑자기 후둑후둑 비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둘은 얼른 반사적으로 처마밑에 들어서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언제부터인지 잔뜩 찌프린 하늘에는 먹장구름이 몰려오고있었다.(계속)


[신철국 장편스포츠실화] 챔피언 1965


차례(지난 기사는 클릭해 볼수 있습니다)

제1장 시련의 계단

봉변/기회의 신(神)결심출국 류학스승의 마음 문제는 어디에?축구의 고향 잊은것과 잃은것/ 어려운 세월에 제로의 답안 /맨발의 선수 첫발자국 /희망을 향하여 

제2장 재기의 언덕

“백전로장” 원수(元帅)가 준 별호 /최초의 전설들(1) 최초의 전설들(2) /

새로운 출발 /“3종1대”/개천의 룡들(1) 개천의 룡들(2)/ 이사도(二沙岛) 

희로애락/ “몰인정”했던 리유 뒤로 밀린 리발 신입대원 정동권 

제3장 승자는 말한다

원자탄 불청객 분노의 벽 빅장대결 귀로의 기쁨 영광의 서장(1) 영광의 서장(2) 불멸의 승부(1) 불멸의 승부(2)




신철국

작가


연길명동문화예술원

부원장

【신철국 작가 프로필】

1971년 왕청현 하마탕향 전하촌(汪清县蛤蚂塘乡前河村)출생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 졸업


연변민족문학원(제1기/1994년), 로신문학원(제30기중청년고급연구토론반·아동문학/2016년) 수료.


‹중국조선족백년실록›집필위원회 위원(스포츠) 력임.


연변텔레비죤방송국 청소년부, '흑룡강신문','길림신문'에서 다편간 편집, 기자로 활약. 연변작가협회 회원.


1986년 아동소설 '신방주인'으로 등단.


'화신문학상','압록강문학상','흑토문학상','연변라지오문학상','상익컵 실화문학상' 등 수상경력 다수. 


단행본 장편스포츠실화 ‹챔피언 1965› 출간.


공저로 ‹60주년에 만난 60인›, ‹중국조선족백년실록›, ‹연변축구의 발자취를 찾아서› 등이 있음.


현재 명동문화예술원 부원장 겸 글짓기지도로 근무.



 안내 : "문학작품"은 sinbalam과 위챗친구하여 보내주시면 등재해드립니다.-신바람


최신 작가와 작품

2020년 최신 작품
(수기) 47살 나를 "아매"라니...(박순자)
[우리민속] 조선족 가족관계,잘 알고 있으세요?(박승권)[영상수필] 김훈 "인정이 그리운 날"(김계월 랑송)
[김호웅 칼럼] "우리 말 굳이 배워야 하나",말이 되나?[문학닷컴] 김재현 시 "어머니 생각" (외4수)
(수필) 민낯 (궁금이)

(평론)불은 누가, 니가 조심해야지, 남자야!-재미나는 김정권의 <불조심> (우상렬)[구술61] 중국조선족음악연구회의 발족과 콩클 개시 (박장수 편 3)
(단편) 익애 (서가인)
 문학작품 더 보기(请点击) 

2020년 작가
칼럼박승권김호웅리성일김혁채영춘리성일우상렬허명철박광성강효삼리성일장동일박광해최학송박승권김혁현춘산채영춘주소란|박광성|예동근|김범송김경애김문일김광림리동렬김정룡문학||박순자김훈김재현궁금이우상렬서가인김정권|현춘산|남룡해림장춘궁금이김창영허강일회령김정권최상운김훈지향옥림운호김병민손룡호렴광호리해란서가인신철국최화길손룡호허강일이문혁김학철김혁림원춘허미란박장길렴광호김재현김수영김두필김일량남영전현춘산서가인리문호리광인김혁한석윤|허미란김학송김호웅남룡해김정권김영분림운호장학규리련화한영철김경진김영택김병민김복순최상운회령채영춘김명숙류영자김춘실류재순려순희김홍남윤청남리동춘심명주최화김명순 [현춘산] 남영전토템시로 본 토템문화 1[허강일 추리소설] 도시는 알고있다18[허강일 추리소설] 흉수는 바로 그놈이였다력사[구술] 박장수 편 3[신철국 장편스포츠실화] 챔피언 1965 (13)[구술] 김학철(7)[珍藏版]리광인 '70년대 사람들'|[구술] 남영전(1) (2) (3) (4) (5) (6) 양림(구술)채영춘(10) 리광인 실화문학《아,나의 중학시절이여》(구술)림원춘(7) |특집[珍藏版] 우리말 어원 산책(렴광호)


조글로·潮歌网조선족 정보 총집합!




    您可能也对以下帖子感兴趣

    文章有问题?点此查看未经处理的缓存